지금 그대 손에 있는 것
명드보라 선교사
비가 내리는 밖을 바라보다가 문을 열고 비를 손에 쥐어봅니다. 물방울 하나도 쪼개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순간 열심히 손 안에서 하나가 되려는 그들을 저도 놓치지 않으려고 부여잡습니다.
그러나 매일 비가 온다고 문을 열고 내리는 비를 무심하게 손바닥으로 내리치면
물방울 하나도 부서지고 맙니다.
적도아래에 땅거미가 지고, 비가 그치고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기 바로 전에 하늘은 잠시 암흑이 되었다가 별이 보이고 달이 웃으면 불을 켠 실내는 곧 밝아집니다. 아침 해가 뜨기 전과 해가 다 넘어가서 어둠이 몰려오기 전에는 짧은 순간이지만 불빛도 별로 밝지 않습니다. 역사적인 일들은 이 같이 짧은 순간에 수도 없이 몰려오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불을 켜도 어두운 순간들이 하루에 두 번이나 있다고 생각하니 멈추어진 시계가 생각났습니다. 시간은 우주가 존재하는 한 마른 풀과 화석과 사라진 별들의 먼지 속에도 멈춘 시계 위도 지나가고 있기에 죽은 것도 산 것과 만나고 있습니다. 바람에 이는 흙 먼지의 입자를 좀 더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오랜 것들이 섞여서 새 것으로 살아가는 지 놀라운 일입니다. 시간이 행진하고 있기 때문에 멈춘 것을 알려줄 수 있기도 합니다.
모하비 사막에서 수 천 마리 양을 이동시키는 목동을 보기 전에는 성경 속의 다윗이나 모세는 필자의 머릿 속에서 왕이나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키보다 긴 막대기를 들고 양을 모는 목자를 보고 차를 세웠던 때가 떠오릅니다. 문득 길가에서 그에게 카메라 앵글을 밀어내다가 이집트에서 도망 나와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목축을 하며 살았던 모세가 생각났습니다. 그것은 그의 생업이자 80세가 되도록 몸에 가장 익숙한 그 자신의 정체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람과 살기보다 가축과 살며 나이를 먹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사람 속으로 보낼 때 자신 없어 떨고 있는 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셨습니다. 양과 염소를 치던 막대기 하나였고 그것이 그였고 전부였습니다.
그 막대기 하나로 수 많은 가축 떼의 길을 정하고, 이동을 시킵니다. 40년이란 시간 속에서 손마디를 굵게 만든 막대기로 바로 왕에게 찾아가 이적을 행하는 그의 손은 애굽에서 60만이 넘는 자신의 민족을 바다에 길을 내어 대 이동을 시킵니다.
수명이 다 된 골동품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산 것과 만나는 데, 살아서 수고하는 우리 손에 주어진 막대기 하나 일지라도 하나님이 쓰실 때는 능력과 기적의 산물입니다. 지금까지는 과거로 묻힐 시간이라면 지금부터는 시간과 함께 행진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기회이기도 합니다. 불순종이 많았지만 순종을 더 할 수 있는 기회, 경쟁으로 일했다면 사람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 사역자나 사람을 가려가며 살아왔다면 우리들이 가진 죄와 함께 약함을 품을 수 있는 기회가 기다리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보다 먼 곳에 있는 사람들만 사랑했다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따뜻한 기회입니다.
매일 우리 삶과 시간을 비추는 빛도 하루에 두 번 turning point가 있습니다. 새벽의 창 앞에서, 노을이 지는 하늘 밑에서 손을 두 번은 살펴보고 싶습니다.
오늘도 선교현장에 수많은 주의 종들의 막대기와 손이 사람을 고치고, 성케하는 일에 스랍처럼 보내져 일하고 있습니다. 부정한 입을 가졌다고 고백한 이사야의 입술을 정결케 한 그 스랍들 속에 그대와 내 모습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죄와 허물을 따지면 엄밀히 모세도 사람을 죽이고 도망 나온 사람입니다. 자기 민족을 도우려 편을 들다 도를 넘어선 그에게 그 민족을 다 맡기신 하나님의 가슴을 읽어봅니다. 기득권이 많은 왕족의 양자 신분을 버리고, 왕실에서 천하게 여기는 가축을 치는 사람으로 40여 년을 살아간 한 남자의 삶 속에서 빛나게 배웠던 지식과 총명이 사라질 나이에 손을 펴보라고 부르신 하나님을 생각해봅니다.
인생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간다지요. 그 때의 모세보다 너무 젊은 당신과 나는 빈손이면 어떻습니까! 아직 참 따뜻하네요. “What is that in your h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