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베일(Veil)
한동안 질밥(Jilbab)을 머리에 쓰고 다녔다. 어느 날 마시던 커피가 바닥이 나서 구멍가게로 불리는 와룽(Warung)엘 갔을 때다. 그 작은 가게 안에 새 냉장고가 있기에 어디서 샀냐고 물으니 옷 가방만 들고 새로 이사 온 내게 시에서 가장 믿을만하고 가격이 싼 전자대리점을 자세히 소개해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터프한 주인의 공손한 말씨와 자세한 정보를 받은 친절에 대한 이유는 머리에 쓴 질밥의 덕이었다.
끄루둥(kerudung) 또는 질밥(Jilbab)이라 불리는 동남아 무슬림 여성들이 쓰는 베일(Veil)을 쓰고 목과 팔과 무릎을 가리고 다니면, 사람들의 언어가 달라진다. 조심스레 존중하는 말로 대접을 받는다. 어떤 연유에서든 이슬람 문화의 장점 중에 하나는 상대방의 가치와 체면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직설적인 표현을 피하고, 상대방이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도록 조심스런 어휘나 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들이 쓰는 베일은 성의 우열을 떠나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스스로를 보호하는 익숙한 문화의 코드이자 오랜 관습이기도 하다. 지금은 월드컵이 전 세계 곳곳의 안방까지 생중계가 된다. 온 몸을 드러내고 응원하는 기독교국가의 여성들의 난잡하고 직설적인 노출에 혀를 차는 대부분의 무슬림들에게는 더욱 자기의 문을 닫게 하는 또 하나의 표본이 되는 셈이다.
지난 봄까지 이슬람세계에 살인과 폭동을 몰고 온 “Danish cartoons"은 유럽의 한 구석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적 이슈(issue)가 되었다. 덴마크에서는 가장 큰 신문인 Jyllands-Posten에 실린 그들의 숭배자이며 영웅 무함마드(Muhammad)에 대하여 폭력과 타락한 범죄자로 묘사하였기 때문이다. 이 일은 이슬람권의 신성한 마지막 선지자 무함마드를 숭배하는 그들의 체면을 완전히 구겨버린 치욕이 되었다. 지난 봄 "Ethne to Ethne" 라는 선교세미나가 동남아시아 B섬에서 열렸다. 나이지리아 목사와 휴식시간에 담화를 나눌 때였다. 지금 무슬림 집단이 기독교 마을을 공격해 살인과 방화가 난무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화로 받았다. 덴마크의 한 신문사에서 한 사람의 만화가가 그린 카툰이 아무 죄도 없는 아프리카의 끝까지 치달아 무고한 목숨을 빼앗아가고 있었다. 그것이 무슬림들에게 왜 그토록 치욕스러운가 하는 관점은, 지난 번 언급한 쏨 형제의 구속 사건처럼 그들의 샤하다(shahadah)에 이사 알마시(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 죄목만으로 2년 6개월의 형이 언도되어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것에서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형식과 의미가 실제로 얼마나 경직된 것인가를 말해준다. 21세기 인터넷의 위력이, 옷을 벗고 사는 이리안 자야(Irian Jaya)까지, 아프리카의 구석까지 보급된 이 개명천지에 지구촌은 창세기부터 존재한 문명충돌을 겪고 있는 것이다.
밧단아람으로 어쩔 수 없이 도망친 야곱이 삼촌 라반의 작은 딸 라헬을 사랑하게 되었다.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7년 동안 라반을 위해 일하기로 약속했다. 성경기자는 야곱이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7년을 수일처럼 여겨졌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첫날밤을 보내고 나보니 그녀는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다. 세상에, 어떻게 여자가 바뀌는데 몰랐을까? 바보 같은 남자아니냐? 그렇게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시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은 베일의 문화를 가졌다. 여성들은 자기의 얼굴을 베일로 가려야 했다. 아침이 되어서 보니, 자기 옆의 그녀가 7년 동안 기다린 여자가 아니었다니!
야곱: "What is this you have done to me?" "Why have you deceived me?"
라반: "It is not our custom here to give the younger daughter in marriage before the older one"
밧단아람의 문화 때문에 그의 인생의 계획이 달라졌지만, 하나님은 그 속에서 남편의 사랑이 적은 레아의 아픔도 만져주셨다. 야곱의 입장에서는 기막히게 속은 것이지만, 두 딸을 가진 라반의 문화적 관점에서는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결혼할 수 없다는 서열이 중요했던 것이다.
선교사를 수 없이 파송한들, 그분들이 진리로 이슬람 내부자들(insiders)의 삶을 새롭게 하기 원한다면서 진리가 아닌 그저 문화적 양식이라 해서 그것들을 무시하거나 존중하지 못한다면 무슬림들과 마음과 마음으로 만날 수 없다. 우리가 가져 간 익숙한 교회문화를 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을 갈아 업으신 살아 있는 진리가 내 속에서 그들 가슴 안으로 전이되어야만 서로 살 수 있다. 결국 두 명의 아내 때문에 두 명의 첩이 더 생겨 12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하나님은 그 속에서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 일하셨던 것처럼, 회심자가 생겼을 때 우리가 그들의 첫 부인만 남기고 이혼을 시켜야하는가에 대한 주장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는 성경의 명백한 본보기다.
야곱은 밧단아람의 문화 안에서 살았지만, 그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과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은 죽는 날까지 한결같았다. 문화와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외적인 그 자신을 적응시켰지만,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하나님에 대한 열망과 순종 그리고 한 여인에 대한 변함없는 마음은 그의 평생 함께했다. 만약 선교사가 되어 그 중심에 이와 같은 꺼지지 않는 심지 하나가 없다면, 상황에 따라 버릴 수도 취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말씀의 깊은 계곡에서 담금질 되어 살다 나왔다고 하겠냐는 것이다. 온 맘을 주지 못한 곳에는 기적도 없다. 내 하나님, 내 사람이 마음에 뿌리를 내려 온 몸의 피와 살과 영혼을 완전히 휘감아 버리지 않았는데, 사람 앞에서 베일을 가려 쓴 영혼으로, 사역자의 외관으로 내면의 가난한 자아를 가리며 하룻밤 꿈같은 전 인생이 주님 앞에 깨어나면 라헬이 아닌 레아가 내 상급이라면 아, 어쩌란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