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단이 끝나고 오늘부터 귀성길로 나라가 온통 난리네요
다음주부터 연휴라서 언어학교도 쉽니다.
오랜만에 갖는 연휴에 그동안 정리하고 싶었던 부흥에 대한것을 책상앞에 앉아서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몇일동안 좀더 보완작업을 하였습니다.

첫번째 부흥과 신앙의 본질에 대한 것을 이번에 정리하였습니다. 좀더 보완작업과 충분한 설명이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기초부분을 정리하였는데, 좀더 중요한 핵심인 오직믿음, 오직 은혜, 오직 십자가, 오직 성령부분이 더 많이 드러나야 할 것 같습니다.

두번째 능력과 권세 즉 성령사역에 대한 것을 정리하기원합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본질을 이론과 실제의 삶에 실천하시면서, 동시에 능력사역을 하셨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복음과 능력사역을 동시에 하였습니다. 두가지는 반드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회복되어야 할 능력사역에 대한 것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세번째 신앙의 본질과 능력(권세)사역을 가지고 타문화권에서 사역하는 내부자운동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이렇게 3가지 부분에 있어서 정리가 끝나면 제가 가지고 있는 내부자운동에 대한 선교신학적 기초가 정리될 것 같습니다. 선교지로 떠나기 전에 기초작업을 대충 하고 나왔지만, 정리가 많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제가 현지 언어를 배우는 기간이라서 정리하는데 시간이 없습니다. 다음번 정리는 크리스마스 연휴쯤에 두번째것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성경의 진리들을 어떤 랜즈를 통해 보지 않고, 가능한한 객관적인 진리들을 도출하기 위해 참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가운데 지금까지 밝혀진 가장 근접한 선교사역은 내부자운동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내부자운동은 전략적 접근이나 따라하기식 사역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본질에서 부터 현장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 부분을 부디 읽어보시고, 부흥과 신앙의 본질에 서는 것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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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에 대해......


                                                                            Insiders선교회 Paul. J. Kim


부흥을 갈구하는 것은 모든 믿는 사람의 염원입니다. 하나님은 중요한 때에 하나님의 일을 부흥이라는 것을 통해 일 하셨습니다. 이미 기독교가 들어가서 있는 곳에서도 하나님은 신앙의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 부흥을 일으키셨습니다. 또한 선교지에서도 주님은 주님께 향하는 거대한 파도와 같은 부흥을 통해 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부흥을 통해 한 세대가 새롭게 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부흥을 갈망하지만, 이 부흥에 대해 많은 편견이 있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내의 석사 과정에서 졸업 논문으로 부흥에 대한 것을 함께 나누며 정리하였습니다. 아주 기초적인 것에 불과하였지만, 그것이 부흥에 대한 중요한 부분을 살펴볼 수 있는 기초였었습니다. 이 기초를 발판으로 부흥에 대한 많은 관심과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흥에 대한 편견과 부흥이 오는 과정 그리고 부흥에 대한 기대 부분을 한번 나누어 볼까합니다. (어떤한 참고 문헌을 써가면서 학적으로 논술하지 않고, 저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써내려가겠습니다)

1) 성장하는 것을 부흥이라 할까요?
부흥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양적인 성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부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극히 일부부만 맞는 말입니다. 부흥은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거대하고 막을 수 없는 파도와 같습니다. 부흥은 양적, 질적, 그리고 사회와 나라를 비롯한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향하도록 변화시킵니다. 그것이 부흥입니다. 포괄적으로 많은 범위를 이야기 하였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정말 포괄적인 많은 부분이 변화됩니다. 하나의 교회, 하나의 선교지역에서 교회의 성장이 부흥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 성장이라고 합니다.
부흥에 대한 많은 예화들이 있습니다. 부흥 때는 어떤 지역이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하게 됩니다. 어떤 해상에서 배가 지나가다가 그 지역에 갔을 때 선원들이 통곡하며 울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하나의 배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지역을 지나간 모든 배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불신자들이 임재를 피해서 도망 다니다가 주님의 임재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임재가 함께하는 사람 주변에서 주님의 임재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수많은 이야기 들이 있습니다.

2) 기도하면 부흥이 올까요?
부흥은 기도함으로 오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부흥을 계획하시는 것도 주님이십니다. 그것을 성취하시는 것도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뜻과 의중이 없는 기도는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흥의 뜻이 전혀 없는데 그 뜻과 의중을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 또 우리가 원하는 지역에서 부흥이 나타내 보이라고 기도한 예는 성경에 한 번도 없습니다. 주님이 부흥에 대한 뜻과 의중을 나타내 보이실 때 그것의 성취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부흥을 위한 기도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부흥을 일으키실 때 그의 기도하는 중보자들을 일으키시고, 주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주님의 길(주님이 일어주시는 방법)을 따르지 않는 기도는 아무리 부흥에 대한 주님의 뜻과 의중을 알아도 소용없습니다.
엘리야는 비오지 않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기도하였습니다. 다시 비가 올 때는 주님이 비를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주님이 비를 주겠다고 약속한 비를 구하는 기도를 할 때, 마치 비가 내리지 않으므로 비가 내리게 해 달라고 하듯이 정말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것도 여러 번……. 그렇게 기도할 때 손바닥만 한 구름이 생겼습니다.
주님은 주님이 이루시겠다고 한 것을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이루시기를 즐겨하십니다. 그것이 부흥을 위한 기도입니다.

3) 부흥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부흥은, 인간이 주님의 얼굴을 구할 때, 주님이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을 인간에게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분별할 수 있도록 많은 부흥에 대한 표징들을 보여주십니다. 한국은 현제 부흥에 대한 강한 열망이 가득합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부흥을 이야기 합니다. 서점을 가면 수많은 부흥을 위한 책들이 널려있습니다. 그리고 부흥을 준비하는 징조들을 하나님은 물밑작업으로 하십니다. 그러나  종교의 중심부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변두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종교의 중심부로부터 박해도 있고 많은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항상 변두리에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 때에도 변두리에서 시작되었고, 초대교회 시대에도 항상 변두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도 초기에는 변두리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강하게 나타난 한 사람을 중심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임재를 부어주십니다. 많은 경우 한 사람을 통해 부흥은 시작됩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준비시키시고 부흥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을 한낱 저속한 신앙이라고 취급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성과 과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신앙을 판단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4) 부흥이 임하는데 물밑 작업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부흥이 임하는데 있어서, 물밑 작업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다림줄(하나님의 기준)이 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거짓과 진짜가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그것을 거짓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그것을 죽은 정통주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올바로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이 선행되어졌습니다.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선교지 조차도 하나님의 다림줄이 세워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먼저 선교사의 거짓신앙을 드러내는 일부터 하셨습니다. 또한 현지인이 먼저 하나님의 다림줄을 보고 부흥이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거짓에 대한 범위는 인간의 범주에서의 거짓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보는 거짓신앙입니다. 우리가 바라볼 때 거짓이 아닐 수 있습니다. 주변사람들도 그렇게 봅니다. 그런데 성경은 수 없이 많이 그 범주에 대해 이야기 하였지만, 우리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합니다. 많은 성경학자, 신학교 교수, 신학자도  눈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습니다. 이론적으로 알아도 경험되어지고 실천되어지지 않습니다. 바리세인도 이와 같았습니다.
바리새인은 당대의 신학자였습니다. 목회자였습니다. 당시 신학과 신앙의 주류였습니다. 열심으로는 우리가 따라 갈 수조차 없는 높은 신앙적 순종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바리새인을 향해 성경을 참 많이 알고 있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뒤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향해 하나님의 형용(하나님의 임재)을 보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알았지만, 지식적으로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경험될 지니) 진리를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되어 지는 것입니다. 바리세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수없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 사랑하지 않는 그 모든 것을 우상이라고 정의 하였습니다. 우상이라는 범주에 이방신이나, 우리의 돈을 우상이라고 많이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좁은 범위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족, 우리의 사역, 우리의 교회, 우리의 선교단체, 우리의 모임 그리고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분만이 목적이고,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삶을 경험함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부흥을 일으키시기 전 앞서 살펴 본 것처럼 반드시 길을 예비하십니다. 반드시 부흥이 오는 길을 예비하는 자들이 준비될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한 분만을 구하며 애통하며 하나님 알기를 열망하며 부르짖으며 가슴을 찢으며 한탄하며 탄식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만지시고 빚으실 것입니다. 그들을 뒷받침하시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5) 부흥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는 무엇을 이야기 하는 건가요?
부흥이 임하는데 있어서 한 개인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시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수 없이 많은 믿음의 선인들이 그것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거짓 믿음(거짓 신앙 혹은 죽은 정통주의)이 분명히 드러나야 합니다. 성경에서도 역사 속에서도 반드시 이 부분이 드러나지 않은 부흥은 없었습니다.
가짜와 진짜가 구별되어진 후 하나님은 진짜를 향한 신앙의 순례를 시작한 사람에게 임재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몇 주만에, 어떤 사람은 몇 년 동안 순례의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임재하십니다. 그 임재의 결과는 항상 같습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없는 죄인인 것을 드러내 보입니다. 즉, 내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십자가만이 죄인 된 나 자신이 힘입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보이십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면 그야말로 죽은 것처럼 된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부흥이 임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흥을 나타낼 또 하나의 말입니다. 이 부흥은 신앙의 본질을 토대로 올 것입니다. 출애굽기 33장은 그것을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6)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면 주변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인도되나요?
하나님의 임재가 강하게 임하는 사람의 주변은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차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죄가 드러나서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주변에는 스스로 자신이 죄임임을 깨닫고 돌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개인이, 교회가, 사회가, 한 국가와 세계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특징은 자신이 인생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경험된 하나님을 '엘'의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경험된 하나님의 이름으로 표현합니다. 그렇게 살면서 하나님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아브라함 시대에 아브라함이 고백한 하나님의 거의 모든 하나님의 이름은, 아브라함이 살았던 지역들의 이방신들의 이름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이방신들의 이름으로 고백하였고, 이방신들을 믿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드러내 보임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을 통해 복의 통로가 되게 하였습니다.

7) 하나님의 임재가운데로 인도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나님의 임재는 반드시 선행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믿음에 대한 진짜와 거짓이 가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진짜를 향한 순례를 떠나는 자신의 삶의 조정이 필요합니다. 사람마다 그 순례를 향하는 여정은 다릅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그 여정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 여정을 산 사람이 옆에서 도와준다면 그 여정의 기간은 단축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직접 가르치십니다.
지금까지 인생여정을 통해 주님의 인도함을 받고, 주님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조정하여 주님께 향한 여정을 시작하였을 때는 지금까지 주님의 가르침과 다른 성령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지금까지 주님께 향하는 삶을 말씀을 통해, 경험을 통해, 기도를 통해 배웠지만, 이 여정은 시작하였을 때는 지금까지와 차원이 다른 성령의 가르침이 시작됩니다.
요한일서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8) 진짜신앙은 무엇이고, 가짜신앙은 무엇입니까?
가짜신앙과 진짜신앙은 경험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경험이라 함은 주님을 향한 경험입니다. 가짜신앙은 하나님에 대해서(지식적으로)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에 대한 열심도 깊습니다. 주님을 향한 헌신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가짜신앙으로 대표되는 용어들이 있습니다. 율법주의, 기복신앙, 인본주의 입니다.
율법주의 - 영적인 우월감을 가지는 것 자체가 율법주의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담는 형식을 통해 자신의 의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 헌금, 봉사, 헌신 등등 주님을 향한 행위뿐만 아니라, 주님을 향한 마음 까지도 그것을 통해 나의 의가 되면, 그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하나님의 많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경험된 하나님이 진짜입니다. 지식적으로 많이 안다고 하면, 사탄이 가장 많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주님을 섬긴 모든 것을 자신의 의로 삼을 때 율법주의 입니다. 자신의 의로 삼은 것은 1% 밖에 안 되고 99%주님의 의라고 고백해도 1%로 말미암아 자신의 의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주님의 기준입니다.
기복신앙 - 자신을 위해 주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다’는 것은 주님을 향한 자신의 열정까지도 포함합니다. 즉 주님의 일이었지만, 그 일을 통해 자신이 조금이라도 드러나거나, 사람들 앞에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1%만이라도 있어도 그것은 기복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나는 그것을 순종함으로 쓰임 받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야 합니다. 그 일 뒤에 나를 향한 조금의 계산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기복신앙입니다. 나 자신을 위한 것이 90%이었던지, 10% 이었던지, 1%였던지 조금이라도 자신의 유익을 구한 즉시 기복신앙이 되어 버립니다. 주님은 100%를 원하십니다.
인본주의 - 인본주의는 자신의 자원으로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살지만 교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들먹입니다. 자신의 방법을 사용하여 주님의 일을 합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일로 말하지만, 그 마음 깊은 곳에 자신의 힘으로 주님의 일을 이루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희생은 가득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을 이루려는 의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지만, 실망과 탈진만 남습니다.

9) 가짜 신앙에서 진짜 신앙으로 회복하는데 단계가 있나요?
자신이 신앙의 가짜였다면 진짜 신앙을 회복하는 데에도 단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지식적으로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여 자신을 조정하는 시기입니다. 참 많은 회개를 합니다. 사람마다 다른데 저는 한 달 동안 하루 종일 울었습니다. 꿈에서도 울었습니다. 일어나서도 울었습니다. 밥 먹으면서도 울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존재인지, 저는 나 자신을 보고 놀랐습니다.
두 번째, 이제 진짜로 신앙생활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아직도 여전히 가짜로 살고 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세 번째, 주님의 임재가 내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보여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주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는 단계입니다.
네 번째, 성경과 종교개혁을 비롯한 역사적인 부흥에 공통적으로 강조된 4가지 단어들이 있었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십자가, 오직 성령입니다. 거짓 신앙체계 단계를 벗어나게 되면 성령이 이 단어들을 개인이 경험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자신의 생각과 욕심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실제적으로 이 단계에 올라서야 하나님의 뜻과 의중 그리고 하나님의 길을 쫒아 행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단계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으면 다음단계로 넘어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단계의 강조점을 중심으로 하나씩 성령이 단계별로 가르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4번째 단계에 진입한 것 같은데 아직도 거짓 신앙 체계 단계에 머물러 있는 나의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지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에 어떤 완전한 단계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가짜신앙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으면 어떤 것을 추구하더라도 부족합니다.

10) 가짜신앙과 진짜 신앙을 분리해서 나오는 결론은 무엇입니까?
가짜와 진짜는 교묘하게 붙어 있어서 참 구분 짓기가 어렵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갈라디아 교회가 이것 때문에 홀딱 넘어가버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로 회복하는 것이 진짜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짜 신앙은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친밀함이 그 목표입니다. 이론적이고 지식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격체되신 그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체험되고 경험되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11)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달리셨습니다. 그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시며 보여주셨습니다. 그 분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위해 2가지 부분에 있어서 신앙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하나님 이외에 그 무엇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말로는 쉽습니다. 그러나 삶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나의 전 존재를 통해서 그 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성령님이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아내와 자식까지 너를 대적하는 무슬림들 손에 내어 줄 수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저는 정말 심각했었습니다. 그 질문 뒤에 있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는 주문과 같은 의미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다 목회를 그리고 성도를 더 사랑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교회사역 즉, 교회성장을 추구한 것이 나의 가장 큰 우상이었습니다. 나는 놀라서 한동안 공황상태에 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다 버리고 주님 사역한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그것이 보여진 것이 큰 충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저는 목회자 자격이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세세하게 주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는 나 자신의 조그마한 것조차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어지면서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졌습니다. 저에게 주님이 하신 처음 명령은 원수에게 가서 사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찾아가서 사과하고 왔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다시 가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충분히 고백하고 용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 교회 교인들에게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목사에게도 개인적으로 다시 고백하고 용서를 빌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하는 것을 성령을 통해 배웠습니다. 남에게 내 마음에 하나라도 섭섭한 마음을 가지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방해하는 요소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경험되어지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필수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는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저희는 나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지식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은 경험되어져야 합니다. 자신의 삶에 경험되어져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경험하며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알게 된 것은 주님의 뜻과 목적을 알려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에 자신의 삶을 조정하여 동참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시대마다 주님의 뜻과 의중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 즉 하나님의 길을 통해 주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주님이 가지신 뜻과 의중에 주의 길을 통해 동참하는 삶입니다. 주님이 일하심을 보고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자신이 가지신 뜻과 의중을 가지고 계십니다. 노아 시대의 하나님의 뜻과 의중은 타락한 인간세상을 쓸어버리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길은 방주였습니다. 노아를 부르셔서 배를 짓게 하고 이 세상에 남겨진 씨를 예비케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생각합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하나님에게는 그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이루기 위해 주의 길로 행할 사람을 찾습니다. 그것이 노아였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뜻과 의중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재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방주를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님의 길(주님의 방법)로 행하였습니다.
다윗시대의 하나님의 뜻과 의중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왕을 세워 메시야를 예비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울을 세우셨지만, 그의 불순종으로 인해 다윗을 세워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하나님의 뜻과 의중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예수님이 지상에 내려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지상에서의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고 계셨지만, 인성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모든 우리의 죄를 도말하였습니다. 그 이름을 힘입지 않고는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길을 여신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주변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일 하심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동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주님의 일하심을 보지 않은 말씀전함, 기적, 치유등등을 하신적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예수님이 몇 번씩 반복하신 단어가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본다”“나는 행한다”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민감해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본 후 그것을 행하는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승천후 예수님이 사신 그대로 살았습니다. 사도행전에 그의 제자였던 베드로가 성전에서 기도하고 나오면서 보행장애자를 주목하였습니다. 이 보행장애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고 나오면서 늘 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고쳐 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 하심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기도하고 나오면서 하나님의 일 하심이 이 사람에게 임해있는 것을 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자 그는 곧 뛰어 서서 걸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일하심을 보고 그것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주님이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길(주님의 방법)을 통해 그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하심을 보고 그것에 동참해야 합니다.

12) 신앙의 본질과 부흥은 어떤 관계가 있나요?
부흥은 반드시 신앙의 본질이 세워질 때 이루어집니다. 단 한 번도 예외 없었습니다. 신앙의 본질 앞에 철저히 세워지지 않는 십자만으로는 성장은 있을 수 있지만, 부흥은 없습니다.

13) 신앙의 본질, 하나님의 나라, 바울신학은 무슨 관계가 있나요?
신앙의 본질 이라고 하면 생소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단지 신앙의 본질적인 삶으로 들어가지 않을 뿐이지 지식적으로는 다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지식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지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알고 있다’ 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지상에 임한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본질을 아주 쉽게 하나님의 나라 개념으로 설명하셨습니다. 너무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로 ‘하나님의 나라’의 용어에서 ‘십자가 복음’혹은 ‘하나님 나라 복음’이라는 단어로 변합니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이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토대로 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성격인데, 점점 초점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춰집니다.
바울은 신앙의 본질을 십자가 복음이라는 단어로 설명하였습니다. 바울이 다른 복음을 설명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서신서는 각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보내진 것들인데, 그것만 보고서 그의 모든 사상을 설명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적은 자료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적어도 저는 바울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추구하되,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추구하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서는, 신앙의 본질과 십자가의 복음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였다는 그것이 바울의 신학사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본질은 십자가 복음으로 이야기 할 수 있고, 하나님 나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모두 같은 말입니다.

14) 우리 사역에 부흥이 오게 하기 위해, 신앙의 본질로 들어서야 하나요?
신앙의 본질로 들어서는 이유가 바로 부흥을 위해서라면, 그것은 거짓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부흥을 위해 신앙의 본질을 추구한 즉시, 거짓신앙의 전형적인 모습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본질로 돌아서는 이유가 부흥이 아니라 순수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열정 때문이어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로 들어섰는데 사역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러면 자신이 뭔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아닙니다. 원래 본질로 돌아서서 사역을 하고 있어야 정상입니다. 뭔가 큰일을 맡길 기대로 가득하다면 그것은 다시 원점(가짜신앙)으로 돌아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로 들어서서 주님 앞에 선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밖에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본질(십자가 복음 혹은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추구하되, 그것을 추구함으로 오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그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 어떤 목회적, 사역적, 경제적인 자신의 기대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15) 너무 거짓 신앙하면서 몰아 세우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몰아세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준을 보고 나면 결코 몰아 세운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나와 주변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 얼마나 다른지, 주님의 다림줄(기준)을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더 거칠고 대담하게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몰아세우셨습니다.

16) 부흥 때는 가려진 진리가 드러난 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나요?
부흥 때에는 가려진 많은 진리들이 드러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가려진 많은 것들이란 표현은 바로 렌즈를 통해 보인 성경의 진리가 회복된다는 말로 생각됩니다. 예를 들면 종교개혁의 많은 진리의 진수들을 스콜라철학이라는 그릇에 담아 설명을 하였습니다. 몇 세기가 지난 지금은 다른 철학 사상이 우리의 모든 사고방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본질을 설명하는데 너무나 많이 그 본질에서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특히 이성과 과학이라는 풍조는 자유주의뿐만 아니라 복음주의 까지 강타하여, 모든 성경말씀을 이성과 과학의 렌즈를 통해 보아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타부시하여 성경 속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쓰여 있으니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은 필요 없다고 주장합니다. 또 성령 사역을 사탄의 조화 또는 저속한 기독교의 모습으로 매도해 버립니다. 부흥 때에는 성령이 강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부흥기 때에 초대교회의 오순절과 같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필수입니다.
믿음으로 얻는 의가 회복됩니다.
그리고 예배가 회복됩니다. 형식적으로만 드리는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중보기도가 회복됩니다. 진젠돌프 백작이 이끌었던 모라비안 교도들은 24시간 중보기도를 100년 동안 지속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다윗은 그의 생존당시에 시온성에서 24시간 중보기도를 만들어서 주님이 주님의 일을 하시는 기도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던 모든 기도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로 바뀌게 됩니다.
예언사역과 예언자라는 직분이 회복되어, 예언을 통해 선교가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분별하여 하나님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때 주님의 명령에 의해 세계 선교가 이루어졌습니다.

17) 하나님이 역사하시는데 단계가 있나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데 7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사사기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는 7가 사이클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인간가운데 역사하는데 있어서 있는 7단계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단계는 “하나님은 잃어버린 세상을 구속하시려는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을 통해 일을 성취하신다”.
2단계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임재와 목적 그리고 그의 길을 대신할 대체물을 향하는 경향이 있다”
3단계는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신다”
4단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도움을 청한다”
5단계는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여기서 4단계와 5단계는 갈림길인데요, 4단계는 옳은 길이고 5단계는 그른 길입니다.
4단계에서 회개한면 6단계는 “하나님은 회개하는 그의 백성들을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켜 주심으로 부흥시키신다”. 여기서 부흥이란 “다시 살리신다” 라는 뜻입니다.
7단계는 하나님께서 부흥시키신 백성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 가운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시며 그를 믿어 구원에 이르도록 잃어버린 영혼들, 곧 안믿는 세상을 이끄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일곱단계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18) 마치면서
부흥은 프로그램이나 전략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이 가지신 뜻과 의중이 있는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을 아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분은 반드시 선행되는 작업을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의 본질에 세워진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그 분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십자가로, 오직 성령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저는 이 부흥을 갈구하는 마음으로 부흥을 연구하였습니다. 내부자운동을 시작한 이유는 무슬림 지역에서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는 전략적인 이유 때문에 연구를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열심히 연구하면서 나의 결론은, 내가 가진 모든 책을 다 버리자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즉 지금까지 공부한 모든 것을 통해 여기까지 도달하였지만, 지금까지 공부한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본질에 다가서는데 큰 방해가 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모든 것이 내가 경험하게 된 신앙의 본질 즉 십자가 복음의 삶, 하나님 나라의 삶에 큰 장애가 되었습니다.
무엇을 바라고 신앙의 본질에 들어서게 되면 또 다른 거짓신앙을 낳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 그 분 한분만을 목적삼고, 그 분 한분만을 위한 열정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추구하는 것이 부흥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지속적으로 주님을 찾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세는 정말 이러한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영광 가운데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그렇게 가까이서 보며,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친구와 같이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기를 원해서,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는 더 큰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한분만이 자신의 모든 것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내가 가져야할 자세는 바로 이런 자세인 것 같습니다. 끝까지 내가 주님을 찾고 그리고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구하는데 있어서도, 나 자신을 돌이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그분을 더 사랑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나 자신이 바꿔지지 않으면, 나는 금방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무나 쉽게 그리고 너무나 급속하게 넘어집니다. 그래서 온 마음으로 지속적으로 주님을 계속해서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17에 “내가 말에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십자가에서 그 능력이 쏟아지지 않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 신앙의 본질이 없으면 ‘말에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을 인용하고, 성경에서 하나도 틀리지 않는 바른 말씀인지 몰라도, 십자가의 능력은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지혜에 불과합니다. 부흥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저의 고백이, 말의 지혜가 되지 않고, 십자가의 능력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