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스테메 E’piste’me
명드보라 선교사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라는 가정을 의심해보는가! 간략하게 말하면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동역자들이 자신들의 필드에서 추방되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요? 라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내가 주의 일을 하려 헌신했는데 나는 왜 추방되는가?
세상과 교회는 예측 불가할 정도로 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파송 받은 그 때의 신념과 기준과 교회관과 선교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일련의 규칙을 생성하고 우리의 사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줍니다. 철학자 미셀푸코는 이것을 ‘에피스테메’라고 불렀는데 사고체계 혹은 ‘인식성’이라 합니다.
토마스 쿤의 얇은 책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으면서 뇌를 세척 당하는 기분을 느낀 것은 그 책을 끝까지 읽은 독자라면 같았을 것 같습니다. 과학자 토마스 쿤은 여러 사람에 의해 수 백 년간 업데이트 된 과학적 탐구를 하면서 화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과학 분야가 새로운 아이디어나 전환을 맞이할 때에 패턴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아무리 명석한 과학자라도 ‘지배적인 패러다임’ 안에서 새로운 지식은 ‘일관성’ 유지를 위해 데이터를 무시하거나 잘못 해석하는 일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론과 법칙에 들어 있는 ‘이상 현상’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죠.
20세기를 넘게 지나오면서 지금 그 변화와 전환의 속도가 가장 빠르며 어떻게 전개될 지 누구도 정확히 읽어낼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선교를, 목회를 그리고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공동체를 어떻게 하시기 원하실까?’ 선교나 목회가 힘든 것은 내가 선교를 목회를 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교회는 그 분이 주인이라며 가르치면서 돌아서면 내가 주인이 된다면 하나님의 임재는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교라서 이 순간도 그 분께 묻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고 주인같은 청지기야!
선교가 약해지는 지금 복음전파를 위한 교회의 패러다임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나를 위한 교회. 내가 하는 선교. 내게 주신 말씀. 세상에 속한 세계관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흔히 ‘내가 주님께 무엇을 놓고’ 혹은 ‘무엇에 대하여’ 기도하는 실수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주님께 묻는(darash) 것입니다.
열심히 물었던 여호수아가 한 큰 실수는 위장을 하고 찾아온 기브온 사람들과 하나님께 묻지 않고 동맹을 맺은 일 입니다.
사람의 관계에서 개인이 아닌 집단에 소속되었을 때 약속은 신중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내게 호의적인 사람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그의 어려움을 당장 해결하려 쉽게 결정하지만 주님께 묻지 않은 것은 결과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님께 묻고 가는 길이 평탄한 것은 아닙니다. 내 것이라 문서에 적힌 것도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알고 있는 사실이 무언가를 모르고 있는 사실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으면 세상 신들에게 바치는 문화콘텐츠나 플랫폼이 좋다고 사용하지만 그 속에서 시간을 소비하며 자기 정체성을 두게 되니, 특히 통일세대 PK, MK들은 하나님께 묻고 그 분을 찾는 일에 인생을 걸고 시간을 만들어야 겠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을 찾고 묻습니다. 이는 히브리 단어 다라쉬darash의 의미이며 모세와 하나님의 관계는 물론 모세 사후 국민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도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보낸 사람이지만, 한 순간의 실수로 인간적 약속을 해서 가나안 점령 길 이스라엘 전체가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섰던 기브온 전투에서, 해와 달에게 멈추라 선포했을 때 역사의 시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는 것은 로다라쉬rodarash 입니다. 묻는 자는 하나님의 사람이며 묻지 않는 자는 당연히 불신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가 하나님께 묻지 않는 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안다고 여긴 주께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고 하신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