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신앙의 본질이, 예수님 시대에 임재 방식의 변화가 왔다
하나님 나라는, 근본적으로 구약의 신앙의 본질이 변한 것은 없지만,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임재 방식이 바뀌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한 성육신이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즉, ‘임마누엘’이 가장 완벽하게 나타난 사건이다.1) 하나님의 임재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재로 변화되었다. 동시에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는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있으시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통하여 도래하였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임재 방식의 변화와 함께 권세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2)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권위(권세)를 부여하셨는데 그 권위가 임재 방식의 전환과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계속해서 유대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신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요 10:24),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말씀하심으로써 응답하신다.
신학적으로 ‘기독론’에서, 예수님의 독특성을 설명한다. 기독론이라는 오늘날의 신학적 설명 방식으로 보지 않고, 신앙의 본질에 있어서 임재의 변화라는 관점으로 보면 훨씬 더 쉽고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설명하기 쉬워진다. 심지어 기독론에 있어서 고등 기독론까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초대교회 시대에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않았고, 예수님도 자신이 하나님이라 단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인데, 이 부분에 대하여 우리 가운데 서양의 신학 방법으로 이 문제를 가지고 만족스런 설명을 하지 못하였다. 대부분 삼위일체를 소개하면서 감정적인 부분에 호소하는 글들이지, 누구나 인식할 수 있을 만한 대답을 못하고 있다. 삼위일체는 서양 사람들의 사고 틀에서 나온 설명 방식이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완전하게 설명하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계시자로서 인식하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A. 예수님은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사람이다
1. 예수님의 증언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식한 것에서 보다 더 발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높여 서술하였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도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분이 곧 생명이며 참 빛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 (요 1:2-4, 9-11)
참 빛으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육신을 입고 거하게 되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계시자(the revealer,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사람)가 되신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1:15-18)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독생자이다(요 1:18).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듯,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과 관계를 갖게 하는 특권이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진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러한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았다. 자신이 안식일에 일하는 근거는 하나님도 역시 안식일에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 놓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요 5:18)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예수님의 정체는 바로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계시자’ 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의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아버지를 ‘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요 1:19),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모두’ 아들에게 ‘보이시기’ 때문이다(요 1:20).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라고 주장하셨다(요 10:30). 그리고 예수님을 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 하였다(요 14:7-8). 이제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예수님은 더욱 발전하여 ‘생명 수여자’ (life-giver)와 ‘심판자 예수’로 발전하며, 예수님은 ‘공경받으실 분’이 된다(요 1:21-30).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최고의 권위를 지니신 분이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완전한 계시자이며, 심판에 관해서는 전권(全權)을 부여받은 분이다.
2. 예수님과 권위(권세)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은, 성경에서 사용된 ‘권위’와 ‘권세’를 가지고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설명하려고한 시도가 있었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다르게 구분해서 설명하지 않고, 섞어서 사용하였기 때문에, 권위(권세, ejxousiva)로 통합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a. 신성모독 갈등
예수님의 권위는 예수님과 바리새인과의 갈등 중에 가장 심각한 갈등인 ‘신성모독’논쟁을 일으키게 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마 21:23).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막 11:28).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눅 20:2).
이 질문은 예수님의 사역 기간 중 종교 지도자들이, 그 당시 가지고 있던 교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향하여 던진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보고 신성모독으로 생각하여 예수님을 향하여 던진 질문이었다.
b. 예수님의 권위는 새로운 임재 방식이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중풍병자를 향하여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자, 친구들에게 이끌려 나왔던 중풍병자는 병을 고침 받았다(막 2:5). 중풍병자의 고침으로 예수님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 2:10)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눅 4:32)고 하였다. 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귀신을 축출하는 사역을 보고서,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막 1:27)고 하였다.
예수님 그분이 권위(권세)이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8)
이러한 권위(권세)는 아버지께서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요 17:2).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과의 갈등은 주로 ‘권위’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던 하나님 대리자로서의 권위를, 예수님이 선언하였고 사역의 현장에서 또 성전이라는 그 권위의 장소를 예수가 점령한 것으로 받아들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침입을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그들은 예수를 죽음으로 몰게 된다. 이처럼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의 갈등은 예수의 권위에 대한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로써 드러나는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 권세의 소유자’로서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다.3)
c. 귄위를 제자들에게 부여하신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권위를 제자들에게 주신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눅 9:1)
지금까지 세상이 창조되고 그 누구도 가지지 못했던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사람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위(권세) 그 자체이었다. 그 권위를 제자들에게 사역을 위하여 주실 수 있는 분이다.
3. 요한복음 1장 1절의 카이(kai)의 용법 문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kai; qeo;" h\n oJ lovgo".)”(요 1:1).
헬라어의 카이(kai, 곧)라는 글자는, 예수님 시대에 사용되던 용법과 성경이 정경으로 확립되었던 4세기 이후의 사용법이 조금 달랐다. 카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그리고’라는 말로 많이 번역한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 1절과 여러 군데에서는 ‘곧’이라는 의미로 번역한다. 문장의 앞뒤 문맥을 보고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다. 문제는 헬라어의 카이가 ‘곧’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 하나님이 바로 예수와 동일하게 일치되는 의미를 가졌느냐? 아니면 원본과 다르지만 원본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느냐이다.
여기서 초대교회 시대에 쓰여진 성경 이외에 다른 헬라어 저작물들을 살펴보면, ‘카이’가 사용된 용법이 원본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되었고, 또한 원본은 아니지만 같은 성질의 것을 가지고 있는 다른 것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언어도 변하게 된다. ‘카이’라는 단어가 초대교회 시절과 다르게 ‘곧’이라는 의미가 사라지고 ‘그리고’라는 의미만이 남게 된다. 그리고 성경이 정경으로 정립되고, 이집트의 아타나시우스(300-373)에 의해 삼위일체 개념의 기초가 만들어지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카이’라는 단어가 원본과 일치하느냐, 아니면 원본과 동일한 성질을 나타내는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느냐를 성경을 통해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우리는 삼위일체 개념의 가장 중요한 핵심 구절 중의 하나인 요한복음 1장 1절이, 말씀과 하나님이 동일한 인물로 말하고 있느냐? 아니면 동일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느냐를 분석해 보아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삼위일체 개념을 모두 지우고 성경을 중립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다시 읽어보아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통적인 고정관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친숙하고 편한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전통을 깨기 싫어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정관념이라는 편견을 없애고 공정하게 다시 연구해 보아야 한다.
이렇게 중립적인 입장에서 연구를 하면 두 가지 모두를 설명하는 것이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잡힌 설명이 되어 진다. 그러나 말씀과 하나님이 일치하는 것보다, 말씀이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가지고 있는 다른 존재로 보는 것이 삼일위체를 부정하는 모든 질문들에 대하여 훨씬 더 만족한 대답을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성서적으로도 훨씬 더 설득력 있다.
성경에서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는 해석이 나오는 곳 이외에, 하나님이 예수라고 말하는 곳은 없다. 고정관념을 벗어 버리면 지금까지 ‘하나님이 곧 예수’라는 공식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계시자라는 것이 훨씬 더 성경의 수많은 것을 적절하게 잘 설명해준다.
4. 예수님과 하나님의 차이점
이렇게 하나님의 모든 전권을 가지셨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다른 것이 있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거하시지 않으면 그 어떤 사역도 하지 않았다. 즉,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아야 했고, 하나님의 의중과 뜻을 벗어난 것을 하지 않으시고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사역을 하였다(요 5:17, 19-20).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십자가를 지기 전에 예수님의 고뇌는,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모든 뜻과 의를 행하는 것이었다(마 26:36, 막 14:32 ~ 42, 눅 22:39 ~ 46).
둘째, 마지막 날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32) 고 하였다.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님조차도 미래에 일어날 마지막 때에 대하여는 알았지만, 마지막 시기는 알지 못하고 하나님만 아시는 것이었다. 예수님도 하나님과 비교하여 한계를 가지신 분이었다.
셋째,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 다음 가는 분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보좌에 오르신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막 16:19). 예수님이 스스로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다(행 2:36). 하나님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행 3:13).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기 위하여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었다(요 17:2).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된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셨지만, 하나님 그분 자신이 아니었다. 본체와 계시자는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내가 바로 하나님이다”라고 단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태초부터 계셨던 예수님이, 하나님과 분명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라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계시자 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한국 기독교가 잘 하는 것 중에 하나가, 교리적으로 조금만 다르면 이단으로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 없는 증거를 조작해 만들고, 인터넷을 통하여 강력하게 여론몰이로 일관한다. 정말 복음에서 벗어난 것들을 지적한 면도 있지만, 모호하게 칼빈과 다른 사상과 성령론을 가졌다는 이유로 이단논쟁에 고초를 당하는 교회와 사람이 있다. 이러한 일은, 조금만 교회가 급성장하고 유명하게 되면 기존의 교회와 목사들 누구나 한번 이상씩 경험하는 한국 기독교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나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맞도록 다fms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뿐이다.
B. 임재 방식의 변화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 계시
1. 태초부터 계셨던 예수
하나님의 계시자로써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셨던 분이다(요 8:58).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요 3:13)고 말하였다. 예수님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고 하시면서, 아버지와 함께 일하고 있는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태초부터 함께 일하고 있었고, 지금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계신다. 즉, 하나님은 이 땅에 임재하셔서 인간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계시하고 일을 이루어 나가셨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사역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 임재하신다.
2. 동정녀 탄생
어떤 사람은 동정녀 탄생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담의 부패와 죄를 물려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그 모친의 죄악을 물려 받지 않았기 때문에 죄로부터 보호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원론에서 나왔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4) 즉, 성경 구절을 끌어들여 자신의 이원론을 증명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경 자체는 그것에 대하여 말할 의도가 아니었다. 이원론적인 전제조건을 가지고 성경을 보게 되면 그러한 논리가 성립이 될 수 있다.
누가는 성령이 마리아에게 임했고, 그 모든 것을 통하여 그녀를 압도했다고 말 할 뿐이다. 성령의 보호를 통해서 마리아에게 날 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 될 것며(눅 1:35), 하나님의 아들은 언제나 존재하였고5), 언제나 존재할 것이고(눅 1:31-35),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육신으로 보낸 방법이 바로 동정녀 수태였다. 나는 동정녀 탄생을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느냐에 대한 대답이라 생각한다.
예수님이 독특하게 탄생하도록 하나님이 배려하신 것은, 그분의 탄생부터가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일반적인 인간과 차별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3. 죄의 용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용서가 가장 첫 번째 필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으셨다.
예수님이 한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그를 향하여 “죄 사함을 받았다.”(막 2:5, 마 9:1, 눅 5:21 ~ 23)라고 선언하시면서,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막 2:10, 눅 5:24)고 말씀하셨다. 심지어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마 9:13, 막 2:17, 눅 5:32). 이 말씀은 주변 사람들을 경악하게 하였을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이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대제사장도 제사를 통하여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는 대리자의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죄를 사해주는 죄 사함을 선언할 수 있는 지위는 아니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레위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비난하자,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신다(눅 5:27-32. 막 5:17).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사람의 신분 귀천 없이 모든 죄인들을 불러 함께 하시며 그들의 죄를 사해주셨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많은 죄를 지은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눈물로 적시며 머리털로 닦으며 회개하였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눅 7:48)고 말씀하셨다.
임재의 방식이 바뀜과 동시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죄 사함의 방식도 바뀌게 되었다. 죄 사함의 권위를 가지신 예수님 그분과 함께 있으며,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반해 유대 지도자들은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여 정결법에 따라서 죄인이나 더러운 자들과는 엄격히 구분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4. 새로운 삶의 변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고 기도하고 바리새인과 그 제자들도 마찬가지인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지 않다며, 예수님께 잘못을 지적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예상과 다른 말씀을 하신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눅 5:34-35)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새로운 임재 방식으로 하나님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기 때문에, 이제는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 임재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혼인집 잔치로 비유하시며, 함께 하는 그 즐거움 때문에 먹고 마시는 것이라 하였다(막 2:19).
그리고 비유하시며 말씀하신 것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눅 5:38-39) 이제 새로운 임재 가운데 사는 삶의 변화를 새포도주와 낡은 포도주로 비유하여 말씀하였다. 낡은 포도주는 과거의 옛 임재 방식이고, 새포도주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한 임재로 인하여 새로운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5. 과거의 인물과 비교
예수님은 여러 차례 과거의 여러 인물들과 자신을 비교하신다. 예수님은 요한이나 솔로몬보다 더 큰 인물로 말씀하셨다(마 12:38-42).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요 8:53)라는 질문에 각 복음서 기자들은“그렇다. 예수님은 독특한 인물이며 다른 모든 사람보다 크다”고 대답할 것을 예상하는 문장으로 서술하였다.6) 그분은 야곱보다 크다(요 4:12). 예수님은 심지어 성전 자체보다 더 큰 분으로 말씀하셨다(마 12:6).
임재의 변화는 과거의 그 어떤 신앙의 위대한 자들보다 더 크고 위엄 있는 분으로 예수님을 말하고 있다.
6.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루노니”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6:5)는 “너희가 나의 말하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이다”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7) 이 표현은 예수님 오시기 이전에는 없었던 표현이다. 그 당시 자신의 스승이나 구약성경 그리고 랍비적 전승을 인용할 때, 앞에 이름이나 출처를 넣어 말하는 관습이 있었다. 예수님은 그것을 따르지 않고 자신이 말한다며 시작하였다.
예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셨다. 이렇게 서두를 시작한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차원이 다른 말씀을 전하셨다. 성경은 그것을 권위(권세)가 있었다고 한다. 즉, 예수님은 말씀에 대한 권위가 있으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면서 권위 있는 새 교훈에 사람들이 놀랐다(막 1:27. 눅 4:36).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자신이 배고픈 것을 잊은 채 말씀에 깊이 빠졌다(마 15:32-39, 마 16:5-12, 막 8:1-10, 막 8:14-21).
예수님의 말씀은 그 말씀 그 자체로 그 시대 그 무엇보다도 권위있고 확신있는 말씀을 전하였다. 그리고 수 많은 사람이 그 말씀에 빠져들었다. 이것은 임재하신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계시자로써, 예수님의 말씀은 자체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7. 율법과 안식일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른 것을 보고서,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예수님은 다윗이 율법의 규정을 위반하였지만 용납되었던 사례를 이야기하시면서,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셨다(막 2:28, 마 12:8, 눅 6:5). 이것은 율법 위에 예수님의 권위가 있으심을 선언하신 것이다. 율법조차도 예수님의 권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마 5:31 ~ 32, 38 ~ 39, 막 10:2 ~ 12). 당시에는 율법의 가장 세세한 부분이라도 위배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저주받을 일로 간주되었지만,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 그것을 개정하셨고 심지어 여러 측면을 무효로 선언하셨다(막 7:1-23).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전통이나 논리로 정당화 되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나 나는 …… 라고 말한다.”는 말로 간단하게 정당화 하였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고발할 증거를 찾기 위해 안식일에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눅 6:9)고 하시며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었다.
이러한 사건들 때문에 예수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갈등을 겪으며 죽임 당하실 빌미를 제공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은 안식일이나 율법 위에 사람을 두는 사람 중심의 사역이었으며, 율법 위에 예수님이 계셨다. 율법과 그에 따른 규정들과 당시의 전통적인 유전들 위에 예수님이 서 계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권위를 가지고 계셔서 율법의 주인이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고 꾸중하였다. 이 사건 이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눅 20:2, 마 21:23, 막 21:27)고 질문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요한의 침례(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하시며 다시 반문하시자, 그들은 대답하지 못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질문은 예수님 자신의 권위와 사역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며,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와 사역의 근원이 하늘에서 온 것임을 우회적으로 주장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 포도원 농부의 비유로 그들을 공격하신다. 포도원 주인이 소출을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그들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고 상하게 하고 내어 쫓았다. 최종적으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냈지만, 그들은 상속자를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다. 포도원 주인은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눅 20:9-18).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적대하고 죽일 빌미를 주게 된 것이 바로 ‘권위’와 관련한 사실들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 방식의 변화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는 율법보다도 더 위에 계셨다.
8. 귀신을 심판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침례(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로 선언 받았다(마 3:13 ~ 17, 막 1:9 ~ 11, 눅 3:21 ~ 22). 그리고 광야에서 시험받으시되 성령을 따라 행동하시는 분으로써 근본적으로 사탄과 대결하시는 분이시며 그 대결에서 승리하시는 분이시다(마 4:1 ~ 11, 막 1:12 ~ 13, 눅 4:1 ~ 13). 그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본 적이 없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마 9:33).
사탄의 조종 아래에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귀신이나 귀신들린 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본다. 그리고 외친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막 3:11) 외친다. 거라사인 지방의 귀신들린 자는 예수님께 경배하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막 5:7)라고 외친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불분명하게 알았는데, 귀신들은 예수님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예수님을 항상 ‘하나님의 아들’, ‘지극히 높으신 자’,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고백하였다.
또한, 예수님의 사역 중에 한 가지는 귀신(또는 귀신들린 사람)을 멸하시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을 만난 귀신은 자신을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기까지 하였다(눅 8:31). 즉, 예수님의 권세는 한계는 귀신을 무저갱으로 보낼 수 있는 권위가 있으셨고, 죽은 자를 살리는 권위이셨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와 반대되는 사탄의 통치와 맞서는 사역들을 하셨으며, 그들을 제어하고 심판하는 권위를 가지셨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보아도 절대 로 하나님의 임재가 사탄과 공존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임재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 이루어짐으로 인해, 사탄과 공존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로 사탄을 물리치셨다(눅 10:18).
또한, 예수님은 이 권능을 자신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제자들에게도 주셨다(마 10:1).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것을 예수님이 가지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시기까지 하신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9. 기적과 치유
예수님은 많은 종류의 질병 치유 기적을 일으키셨다.8) 예수님은 병자를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 즉 사랑과 긍휼의 감정 때문에 심장이 움직이는 감정으로9) 고쳐 주셨다. 또한, 자연에 대한 기적10)과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11) 모두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기적들이었다. 또한,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하여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고 죽을 자를 살리고 질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이러한 기적은 예수님의 정체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표적이었다(요 2:11). 예수님의 기적 때문에 바람과 바다를 제어하는 그는 대체 누구인가(막 4:35 ~ 41)? 불치의 병을 고치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 앞에 세상이 시작된 이래 그런 기적이 없었다고 말한다(요 9:32).
기적과 치유는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의 변화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서 인간이 창조된 창조 원형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임재의 변화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은 바로 제자들에게로 옮겨 갔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는 능력만 준 것이 아니라,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마 10:1).
10. 천사
성경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눅 12:8-9)
그들은 ‘하나님의 천사들’로 불렸다(눅 15:10). 그런데 하나님의 천사를 예수님 자신이 부리고 있는 것을 말씀하셨다.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마 13:41)
예수님은 하나님의 천사까지도 부릴 수 있는 권세가 있었다. 이 본문에서 ‘그 나라’는 하나님 나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신앙의 본질을 소유하신 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신앙의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 성취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의 계시자로써 예수님은 천사조차 부릴 수 있었다.
11. 인간의 운명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의 관심은 의식과 율법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의 미래가 달린 결정적인 문제가 바로 예수님 자신에 대한 반응에 의해 결정된다고 선언하셨다.12) 예수님은 사람들의 미래의 행복, 천국이냐 지옥이냐, 축복이냐 저주냐 하는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은, 예수님을 받아 들이냐 거부하느냐에 의해서 결정되었다.1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마 10:32)
예수님은 오직 자신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셨다. 부모, 아내 혹은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 더한 사랑을 요구하셨다(눅 14:26).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의 대상자를 바꾸셨다. 바로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계시자로써 예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다.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할 때,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양과 염소를 구별하며, 모든 세상을 심판하고 영원한 생명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마 25:31-46) 하였다.
또한 예수님은 신성한 지혜의 계시자였다. 예수님은 과거에 지혜를 가르쳤던 교사의 방식을 이용하여, 잠언, 수수께끼, 시, 역설, 비유 등을 들어서 가르치셨다.14) 예수님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하나님과의 관계(마 11:25-27)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은 끔찍한 심판을 초래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거부하는 행위였다(마 23:29-39).
C. 임재 방식의 변화에 대한 다른 증언
1. 침례(세례)요한의 설교
침례 요한은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것과 메시아의 출현이 동시에 발생한다고 하였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 3:11)15)
이 설교는 침례 요한 뒤에 오시는 이가, 인격과 사역에 있어서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침례 요한이 하나님께 어떠한 계시를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침례 요한이 예수님이 선포하신 메시지와 같은 메시지였다는 것은 확실하며, 그 메시지 속에는 오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 사상을 초월하는 더 큰 능력인데, 실제로 침례 요한이 생각한 것보다도 더 엄청난 권능으로 오셨다. 그리고 침례 요한은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은 하나님의 기준을 세우되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 눅 3:17) 하였다.
사실상 침례 요한이 인식한 것보다 더 엄청난 임재 방식의 변화에 그는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이가 맞는지 확인할 정도였다(눅 9:17).
2. 제자를 부르심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이 직접 선택하였다. 자신이 제자가 되고 따르고 싶어도 허락하는 사람만이 따를 수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를 선택하실 때 회개하는 자를 선택하였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죽어지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어찌나 자신의 전적인 타락을 경험하였는지 예수님을 가까이하지도 못하고 자신을 떠나도록 간구하였다(눅 5:8). 이러한 회개를 경험한 베드로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제자로 받아 들이셨다(눅 5:10-11).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막 3:14-15)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첫 번째 목적은, 자기와 함께 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전도하고 권능을 주시는 것은 그 다음의 목적이었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계시자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는 임재 방식의 전환이, 제자를 부르시고 함께 하시는 첫 번째 이유가 되었다.
3. 경배(proskunevw)
성경에서 경배를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다. 그런데 성경의 많은 부분은 하나님께만 드릴 수 있는 경배를 예수님께 드리고 있다.
거라사인 지방의 귀신들린 자는 예수님께 절하였다(막 5:6). 영적 존재들은 이미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했다(마 2:2, 8, 11). 나병환자가 예수께 나아와 경배하였다(마 8:2). 한 관리가 예수님께 나아와 경배하였다(마 9:18).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앞에 제자들이 경배하였다(마 14:33). 가나안 여자가 예수께 경배하였다(마 15:25). 병 고침을 받은 맹인이 예수님께 경배하였다(요 9: 38).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경배하였다(마 20:20).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온 여자들이 예수님 앞에 경배하였다(마 28:9).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시하신 산에서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하였다(마 28:17). 하늘로 승천하시는 예수님에게 경배한다(눅 24:52).
기적을 일으키신 것과 청탁의 목적 때문에 경배한 것을 제외하더라도, 경배가 한 인간이 받을 모든 경지를 뛰어넘는 것들이었다. 특히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하게 경험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경배의 대상이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자로 이 땅에서 사셨다.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이시며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에 경배 받으셨다.
4. 예수님의 호칭
예수님에 대한 호칭은 여러 가지가 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었다.16) 마태와 누가는 자기들이 기록한 족보에서 예수님을 다윗 왕가의 약속된 계승자이자 완성자로 보았다(마 1:1,6; 눅 3:31). 예수님은 이 호칭을 인정하시면서 그렇게 지칭되는 것을 회피하실 때도 있었다. 이러한 호칭을 공개적으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사용하였다. 이러한 이유는 사람들의 오해가 가장 큰 이유였다.
예수님은 ‘선지자’라는 호칭을 더 많이 받으셨다.17)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엘리아라고 인식하기도 하였고, 혹은 예레미아(마 16:14)라하며, 이전 선지자가 예언했던 것을 가져오는 ‘그’선지자(신 18:15)로 인식하였다.18)
예수님은 또‘주’로 불리셨다. 우리말에서는 주인이라는 뜻이지만, 원어에서는 존경의 의미를 가지고 사용된 단어이다. 하나님과 함께 사용될 때는 고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마 7:21-23; 눅 6:46).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더욱 고귀한 의미로 사용되었다.19)
예수님을 지칭한 가장 큰 호칭은 3가지를 분류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그리스도)’, ‘인자’이다.
a.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은 구약(시 2:7; 삼하 7:14)과 신구약 중간기 문헌들20) 가운데 나타나는데, 메시아의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신약에서는 신자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였다(롬 8:14; 갈 3:26; 4:5-6).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하나님과 독특하고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갖고 계심을 말씀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5-27)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써 진한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막 12:6; 요 3:16),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갖고 계신 하나님께 입양된다(갈 4:7).
b. 메시아(그리스도)
‘메시아(마쉬아흐, aj;yvim)’는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크리스토스, Cristov")’는 헬라어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를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사용하고자 하지 않으셨다.21) 이유는 로마와의 즉각적인 충돌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은밀한 자리에서 자신이 약속된 메시야임을 인정하셨다(요 4:25 ~ 26. 막 8:27 ~ 30. 막 15:2). 예수님은 ‘메시아’라는 호칭과 연관된 오해 때문에 자신의 메시아 신분을 쉽게 인정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계셨다.22) 예수님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인정하셨다(마 26:63 ~ 64). 십자가의 명패도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메시아는 선지자와 왕과 제사장이라는 삼중 직무 모두를 나타내는 말이다.23)
c. 인자
인자(oJ uiJo;" tou' ajnqrwvpou)는 ‘그 사람의 아들’이란 뜻으로써, 성경에 빈번하게 등장한다.24) 인자에 대해서는 일정한 주장보다, 다양한 주장들이 지금까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신학자마다 조금씩 다르고 신학 노선에 따라 정말 다양하다.
로버트 스타인은, 인자에 대하여 독특한 주장을 하였다.
“예수님 시대에는 인자라는 단어가 메시아와 관련하여 사용된 호칭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지칭하기 위해 이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복음서에서 이 말이 호칭으로 사용된 것은 예수님이 이 말을 자신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하셨기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예수님이 인자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신 이유는 ‘다윗의 자손’ 혹은 ‘메시아’라는 잘 알려진 메시아적 호칭을 피하기 위함이었다고 하였다. 즉 가깝고 내부적인 사람에게는 메시아로 인식되었지만, 일반적으로 드러나는 상황 가운데는 인자로 호칭함으로 일반적인 지칭으로 예수님이 사용하셨다. 25)
김세윤 교수는 인자에 대하여 연구하고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
“그‘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로 예수는 자신이 종말에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하나님의 자녀)을 창조하여 그들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며 그의 사랑과 부요함을 덕 입어 살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은근히 나타내려 한 것이다.“26)
사실 성경에서 인자의 의미에 대한 연구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수님이 ‘인자’로 말씀하신 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 되었다는 것밖에 없다.
이와 같이 예수님에 대한 호칭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전후로 더욱 고귀하게 여겨졌으며, 부활 이후 공개적이고 과감하게 예수님의 이름들을 제자들이 사용하였다. 이러한 이름으로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계시자로써 전혀 손색없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5. 죄가 없으신 예수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알지도 못하고(고후 5:21),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벧전 2:21 ~ 25), 의인이시며(벧전 3:18, 요일3:7), 그에게는 죄가 없다(요일 3:5)고 성경은 명백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흠 없는 제물로 묘사하였다(벧전 1:19). 그분의 별명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 36; 계 5:6 ~ 6:5; 12:11; 14:1)이었다. 유월절 양(고전 5:7)으로도 불려졌고, 하나님의 향기로운 제물로도 불려졌다(엡 5:2). 밧모섬에서 요한은 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죽임당한 후 승리하신 어린 양(계 5:6)이라 하였다.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분으로써, 예수님이 죄가 없으셨던 것을 성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음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좀 더 확대하여 생각하면, 하나님의 임재의 변화인 예수 그리스도가 죄가 없으신 의인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의로 죄를 사해주시는 권위를 가지신 예수님이 당연히 죄가 없으신 분이었다는 것은 자명한 자실이다.
6. 십자가의 예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시고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이 다시 오실 약속의 기간을 ‘말세’라 한다. 이렇게 예수님과의 약속의 기간인 말세가 약 2000여년이나 지났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아직까지 완성되지 않았다. 그분의 사역 또한 완성되지 않았다. 그분이 다시 오셔서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그의 백성과 만나야 끝날 것이다(막 14:25).
예수님의 부활승천 이후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와 함께 하는 임재 방식은 이제 보혜사 성령이다. 우리와의 친밀한 관계를 지금도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맺고 계시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계시자가 되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 15:26)
마지막 날 그분과의 기쁨의 재회를 통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간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계시자로써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완성될 것이다. 다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는 더욱 가까이에서 그분의 임재 가운데 성대한 잔치를 기쁨으로 즐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약의 희생 제사를 통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율례의 완성을 이루셨다. 단번에 이루신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의 죄책뿐만이 아니라, 너무나 쉽고 간단하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7. 인간으로서의 예수
예수님의 잉태는 특별하였지만, 예수님의 탄생하신 순간은 인간의 분만이었다. 예수님은 인간과 같이 전형적인 족보를 가지고 계셨다. 자라는 동안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눅 5:52)가셨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처럼 동일한 육체적 한계를 가지셨다. 금식하였을 때 배고픔을 체험하였고(마 4:2), 갈증도 체험하셨고(요 19:28), 여행 중에 피로함을 느끼기도(요 4:6) 하였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깨어서 기도하고자 하였던 예수님의 기대를 저버린, 잠들어버린 제자들을 향하여 실망하였다. 마침내 모든 사람과 같이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셨고, 죽으셨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셨지만, 하나님 그분의 계시자로 인간과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이었다.
1) 달라스 윌라드, op. cit., p. 125.
2) 1996년도 침례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권종선 교수는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임재방식의 변화와 권세에 대하여 언급하며,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구절들을 소개한 바 있다. 본인은 권종선 교수의 연구 중이었던 가르침을 지금, 본 연구 논문을 통해 완성하게 되었다.
3) 권종선 교수, 침례신학대학원 신약개론 강의중.
4) 로버트 스타인, 「메시아 예수」 황영철 역, (서울 : IVP, 2001) p. 89.
5) 눅 3:23-38에 나오는 모든 족보 이전에 그리고 창세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있었다.
6) 로버트 스타인, op. cit., p. 169.
7) Ibid.,
8) 베드로 장모의 치유(막 1:23-28; 눅 4:31-37, 중풍환자(마 9:1-8; 막 2:1-12:5; 5:17-26), 손마른자(마 12:9-14; 막 3:1-6; 눅 6:6-11), 혈루병여인(마 9:20; 막 10:46-52; 눅 18:35-43), 여리고 두소경(마 20:29-34; 막 10:46-52; 눅 18:35-43), 백부장 여인(마 8:5-13; 눅 7:1-10), 두소경(마 9:27-31).
9) R. C. Lenski, "마가복음 주성상", 배영철 역, 서울: 백합출판사, 1976. p. 83.
10) 풍랑을 잠잠케 한 것(마8:23-27; 막 4:35-41; 눅 8:22-25), 물위를 걸음(마 14:22-23; 막 6:45-52), 무화과 나무저주(마 21:12-22; 막 11:12-25; 눅 19:45-46).
11) 마 9:18-26; 막 5:22-24, 35-43; 눅 8:41-42, 49-56.
12) 로버트 스타인, op. cit, p. 170.
13) 마 11:6; 막 8:34-38; 9:37.
14) 마 5:42에 예수님은 가르침을 통해 집회서 4:4-6을 인용하였고, 막 4:25에서는 제2 에스드라 7:25을 인용하였다.
15) 막 1:8. 눅 3:16.
16) 마 9:27; 15:22; 막 10:47-48; 눅 7:39; 24:19.
17) 마 21:11, 46; 막 6:4, 14-15; 8:27-28; 눅 7:39; 24:19.
18) 로버트 스타인, op. cit., p. 171.
19) 게할더스 보스, 「예수의 자기계시」 이승구 역, (서울:엠마오 1986) pp. 132-157.
20) 제2 에스드라서 7:28; 13:32, 37, 52; 14:9; 에녹서 105:2.
21) 로버트 스타인, op. cit., p. 173.
22) 로버트 스타인, op. cit., p. 174.
23) 게할더스 보스, op. cit. p. 131.
24) 공관복음에 69회, 요한복음에 13회.
25) 로버트 스타인, op. cit., p. 176.
26) 김세윤, 「그 ‘사람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홍성희 & 정태엽 역. (서울:엠마오. 1992) p. 172.
김바울 선교사
이 부분은 새로운 기독론으로써, 삼위일체의 성자 부분을 동양인의 인식 가운데 다르게 설명한 것입니다.
새로운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존에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인식에서 변한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설명하는 방식이 변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