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본질


신앙의 본질을 한 단어로 이야기하면, 인간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Relationship)’이다. 신앙의 본질은 3가지 영역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한 분 되신 하나님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사랑’의 관계이다. 둘째는 하나님 그분을 ‘아는 것’이다. 셋째는 인간과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신앙의 본질을 “길”이라는 단어로 이야기하였다.

구약의 신앙의 본질을 신학용어로 ‘구약의 중심’으로 정의하며, 그것이 무엇인지 찾는 작업을 약 200여 년 동안 계속해 왔다.1) 이러한 변천사를 게하르드 하젤이 정리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2)

 

아이크롯트(Eichrodt)과 델홀은 “언약개념”3)이라 하였고, 젤린(E. Sellin)은 “하나님의 성결(holiness of God)”4)이라 하였고, 쾰러(L. Koehler)는 “주인이신 하나님(God as the Lord)”5)이라 하였고, 빌트버거(H, Wildberger)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선택”6)이라 하였고, 세바스(H. Seebass)는 “하나님의 통치권(rulership of God)”7)이라 하였고, 클라인(G. Klein)은 “하나님 나라”8)라 하였고, 포러(G. Fohrer)는 “하나님의 통치(Rule)와 신인 사이의 교통(communion)”9)이라 하였고, 프리젠(Vriezen)은 “하나님이 중심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람,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10)라 하였고, 스멘드(R. Smend)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 야웨의 백성 이스라엘”11)이라 하였고, 폰 라드는  구약에는 주제가 없지만“야웨가 구약의 중심이며 관계이다”12)고 하였고, 헤르만(S. Herrmann)은 폰 라드의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신명기서가 그 자체를 성경신학의 중심13)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오늘날까지 학자들 간에 일치점을 찾을 수 없지만, 신약이 그리스도 가 중심인 것처럼 구약은 하나님(야웨)이 중심이라는 것에는 학자들 대부분 동의한다.14) 하나님을 통합적인 중심으로 인정하는 것은 구약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이다.15) 특히 복음주의는 이러한 가치관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신약으로 넘어와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신앙의 본질은 구약과 신약이 다르게 말하고 있지 않는다. 동일하며, 구약의 연장선 안에서 신약이 펼쳐진다.

 

이와 같이 내가 제시한 신앙의 본질은 복음주의에서 동의하고 있는 신학의 주제를 넘어서는 것이 아닌, 우리 시대에 신학적인 연구를 우리 시대에 적합하게 설명하고자 하는 설명 방법이다. 이 설명 방법이 우리 시대 누구나가 이해하기 쉬운 가장 적절한 방법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A.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이다


하나님은 추상적, 관념적이 아닌 실제 인격체이시다. 그러기에 실제적 관계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너무나 추상적이며, 관념적이며, 교리적이다. 하나님에 관해서는 성경공부를 통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하나님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라 하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호해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 시대 가장 먼저 회복되어야 할 것은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1. 천지 창조에 나타난 신앙의 본질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엿새 동안 창조하셨다(창 1:1-31). 마지막 날 하나님은 땅 위에 살 모든 동물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을 특별하게 창조하였다. 그분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였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 지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우리를 창조하시는 그 목적에는 특히 이 땅의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이 만물을 통치할 대리인으로 우리를 창조하셨다. 이것은 인간과의 관계를 갖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가 아닐 수 없다.16) 우리와 관계를 맺고 친밀함을 갖기 원하시는 하나님은 자주 아담과 하와와 함께 동산을 거니시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통치하는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였으며, “명령을 받을 수 있는 존재”였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고 계신 분이며 지금 이 순간도 우리와 소통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또한, 지구의 자연환경에 대한 보호나 개선을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 하며 적극 참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명령을 따르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신뢰 관계의 단절이었다. 그리고 창조계 전체의 대재난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롬 5:12; 8:22). 죄가 인간뿐만 아니라, 이 세상 피조 세계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켰고,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의 왜곡을 가져 왔다. 지상의 모든 문제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즉, 인간의 타락에서 파생한 것이다. 그래서  "……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창 3:17) 피조물도 인간처럼 고통을 당하고 있다(롬 8:19-22). 그래서 타락이란?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롬 1:28)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성서는 타락이라 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연합되어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양식을 먹으며 살아야 한다(마 4:4). 아담 이후로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이 하나님을 잃을 때 불안, 고독, 시기 질투, 이기심, 공격적 본능과 투쟁, 피 흘림, 증오와 갈등의 모든 것이 발생한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다. 사랑을 알지 못한 인간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공격적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사랑을 잃어버린 인간은 너무 추하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하나님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알아야 한다. 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고 하였다.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원하는 하나님의 열심은, 구약 역사 가운데 진행되어 오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극적인 꽃을 피웠다.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원하신다.

 

우리가 회복과 관련하여 알아야 할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십자가를 통해 개인적인 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파생된 모든 피조 세계에 대한 책임이 인간에게 있고, 하나님의 회복 대상에 포함되어야 하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여야 한다.


2. 모세와 백성에게 말씀하신 신앙의 본질


구약신앙의 중심은 출애굽기에서 발견한다. 물론 창세기를 통하여 발견되어 질 수 있지만, 출애굽기만큼 정확하고 확고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구약의 신앙의 본질은 출애굽기 19장 4절에 잘 나와 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출 19:4)


애굽에서 자신의 백성을 건져내신 하나님의 목적은 자기 자신에게로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와 친밀한 교제를 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다. 하나님 그분이 자신의 삶의 유일한 모든 것 되어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유일한 삶의 목적과 목표가 되는 것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 ~ 6)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는 것을 율법이라 해석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바로 앞 절의 자신에게 인도하신다는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율법과 규례를 명하시기 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친밀한 관계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율법은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이 언약 다음에 나온다. 하나님이 백성과 언약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전 존재이시고, 유일한 모든 것이 되는 친밀한 관계를 언약한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과 자신의 백성이 이 언약을 기반으로 하나님께 인도하는 ‘하나님의 길’이다.

 

하나님께로 인도한다는 의미는 바로 한 분 되신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관계를 맺는 것이다. 모세는 신명기를 통하여 그들이 잡아야 할 유일한 한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신앙의 본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명기에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T;b]h'a;w)하라.” (신 6:5)


호세아는 호세아 6:6에서 이 말씀의 의미를 “하나님을 사랑(yTix]p'j; ds,j, yKi )”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yhil|a> t['d'w_)”이라 정의하였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새번역. 호 6:6)


구약의 신앙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격체 되신 하나님 그분과 친밀한 사랑의 관계로 인도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만이 유일한 나의 모든 것 되고, 나의 목표와 목적이 된다는 의미이다.


3. 구약에서 신앙의 본질로 나아가는 법


출애굽기 19장에 신앙의 본질을 말씀하시고 그 이후부터 율법과 제사법들을 말씀하셨다. 율법과 제사는 하나님과 자신의 백성이 이 언약을 기반으로 하나님께 인도하는 하나님의 길이었다.

 

율법은 율법을 통해 무엇이 죄인지를 알게 될 뿐만 아니라,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구별함을 통하여 항상 거룩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과 제사를 통하여 바른 예배로 인도하였다.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이다.17) 예수님은 율법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한 마디 말로 줄여서 말씀하셨다(마 22:34-40; 막 12:28-34; 눅 10:25-28). 바울은 율법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갈 5:14, 6:2). 바울은 율법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냉혹하게 비판하였지만, 율법의 완성은 사랑의 결과18)라고 선언한다(갈 5:14, 6:2; 롬 13:8).


4. 율법과 제사는 신앙의 본질을 담는 그릇(형식)이다.


호세아 6장 6절에는 “나는 인애(사랑)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하였다. 주님이 원하는 두 가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 그분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은 번제와 제사, 즉 예배와 속죄의식이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두 가지는 번제와 제사인데, 번제와 제사는 원래 하나님이 드리라고 하셨다. 레위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그것을 정하셨다. 심지어 하나님은 그것들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그것들을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어떤 때는 제사를 좋아하셨다가, 다른 때는 그것을 싫어하시는 분으로 오해할 수 있다.

이 점이 바로 우리에게 우리 신앙의 본질(reality)과 의식(ritual)의 관계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제사와 번제를 포함한 모든 종교적인 행위와 의식은 그 본질을 상징하고 표현하는 것이다.19) 즉, 본질을 담는 그릇이다. 윌리엄 다이어네스는 율법과 예배를 다음과 같이 저술하였다.


율법은 하나님이 백성에게 어떤 행동이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물로서의 그들의 위치에 적합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언약과 함께 율법을 주신 것은 일종은 계시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율법에서 하나님이 예배를 가르치신 목적이 있다. 그들은 예배드리기에 적합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죄인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다. 율법은 정결케함과 희생, 즉 한마디로 말해서 구속을 준비하는 역할이 그 사명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신앙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주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이미 단절된 교제와 우정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길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20)


우리 신앙에서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과 의식들은 본질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표현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그 속에 본질이 담겨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만약 그 속에 본질이 담겨 있지 않으면, 아무리 화려한 의식이나 많은 희생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5. 본질이 있을 때만 형식이 의미가 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있어서, 의식을 잘 하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을 행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위한 수단 즉, 그릇과 같은 것이지 신앙생활 자체가 아니다. 즉 신앙생활이 본질이요, 의식은 그 본질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이다.

 

이사야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왜곡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은 누구보다도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아무리 말씀하셔도, 자신들은 그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렙 7:13). 이사야의 말이 너무 귀에 거친 말들이었다. 그래서 이사야를 톱으로 켜 죽였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이사야 1:10-15)


 여기에서 소돔의 통치자들과 고모라의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그렇게 부르고 계신다. 그들은 참으로 많은 희생과 제사를 드렸다. 그들은 모든 절기를 철저하게 지켰다. 안식일은 말할 것도 없고 월삭(매월 첫날)을 지켰고 모든 대회와 절기를 지켰다. 오늘날로 말하면 맥추감사절, 대강절, 사순절, 오순절 등과 같은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절기까지 그들은 빼놓지 않고 철저하게 지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 절기마다 수많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숫양, 수송아지, 어린 양, 숫염소 등 그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또한 많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 이사야 58장에 의하면, 그들은 정기적으로 온 백성이 금식하며 기도했다(사 58:1-14).

 

그런데 그들의 예배(절기)와 헌금(희생)과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그 모든 예배와 헌금에 신물이 났다고 말씀하셨으며, 심지어 그것들을 증오하신다고까지 말씀하셨다. 또한, 그 모든 모임들과 예배들은 하나님의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것과 같은 헛된 예배에 불과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의 의식 속에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삶 속에 신앙의 형식은 차고 넘치지만,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도 없고,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유일한 모든 것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라고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것이 살길이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에는 본질과 의식의 하나로 통합된 것을 전제로 하신 말씀이다. 본질이 없어지고 의식만 남는 것은 신앙의 본질을 떠난 것으로 간주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신다. 의식이 아무리 많아도 상관이 없다. 그 모든 의식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호세아 4:1-6).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생각마저 들여다보실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이 행동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의 깊은 곳까지 모두 아신다. 우리의 동기가 어떤 동기로 시작되었는지, 나 자신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잘 아신다. 그러므로 나의 거짓된 동기로 말미암은 외적인 의식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무리 화려한 의식이나 많은 희생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은 구약시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생활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기준이다.


6.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새로운 길


구약에서는 5제사와 7절기 그리고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러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만드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과 부활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담대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십자가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하여 더 이상 죄의 정죄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 아래 있도록 한다. 십자가는 유대인을 향하여서는 율법의 완성이지만, 이방인에게 있어서는 율법이 필요 없게 만든 것이다. 십자가는, 신앙의 본질이 변하지 않았지만, 신앙의 본질로 나아가는 방법에 변화를 주었을 뿐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의 기준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십자가를 통하여 그의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십자가로 인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맺는 실제를 말씀하셨다.


7. 하나님이 최고로 존귀한 분이심을 인정


예배는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돌려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한한 가치가 있는 분이심을 인정하는 행위와 태도들과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배는 한마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흔히 예배라 주장하기도 한다.21) 예배라고 주장하게 되면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배가 타락하고 껍데기만 남은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이도 우리 시대에는 거짓 임재를 만들어내는데 많은 재능들을 가지고 있다. 나도 한 때 이러한 가짜 임재를 잘 만들어 내는 목사 중에 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처럼 만들어진 분위기가 진짜 임재인 것처럼 만들어 낼 수 있다. 없는 거룩함을 만들기 위해 목소리에 힘을 주고 거룩한 목소리를 만들 수 있다. 임재가 없는데 어떻게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중세시대에 얼마나 그것이 심하였으면, 칼빈은 교회에 음악을 없애버려서 약300여 년 간 교회에 제한된 음악을 사용하던 시대도 있었다. 역사적으로 예배가 타락하지 않은 시대보다 타락한 시대가 훨씬 길고 많았다. 예배의 타락은 임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기준 앞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하나님이 임재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어떤 신령한 분위나 감정을 가지고 임재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 수 있고, 흉내낼 수 있는 방법으로 임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누구나 임재하심을 느끼도록 임재하신다. 임재하심의 기준은 분위기도 아니고 호화로운 프로그램도 아니다. 인간의 기준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오직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과 그분의 의중이 기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예배를 통해 가장 크게 나타나지만, 예배가 워낙 타락하기 쉽기 때문에 예배라 단정짓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예배라는 그릇을 통하여 가장 크게 나타난다.

 

하나님은 최고로 존귀하신 분이시다. 그분과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그분 앞에 엎드리게 한다. 스티븐 호돈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 순종(복종)하여 경배해야 한다. 그저 자신이 최고라는 이유 때문에 자신에게 예배를 드리라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이라면 그리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실상 그런 하나님이라면 흠모할 만하지도 않은 분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또 하나님이 찬양받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면 마치 하나님이 자아상이 좋지 않아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려 애쓴다 해서 마치 하나님이 경쟁하는 다른 신들에게 위협을 느끼는 까다로운 부족신인 듯이 말하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은 위협을 받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람들이 거짓된 것으로 예배할 때 무한히 슬퍼하신다.

 

참된 예배란 사람들이 하나님이 누구신지 깨닫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유롭게 하나님께 다가가 개인적으로 감사를 드리고, 날마다 충성을 바치는 것. 그것이 예배라 하였다. 예배는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고 상호 작용을 하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오는 것을 기뻐하신다. 하나님께는 결코 선물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은 드리는 자들을 원하신다.22)


예배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예배는 또한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사랑을 성취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나머지, 그저 그들이 위대하게 되도록 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영예를 누리게 하고 싶어 하신다.23)


8.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기준에 달려있다


a. 하나님의 기준이란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계시다. 하나님의 기준이라 함은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신 하나님의 의중’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중과 우리의 생각의 차이를 아는 분별력이라 설명할 수 있다. 많은 경우 자신을 생각을 성경에서 인용하였지만, 하나님의 기준과 전혀 관계없이 자신의 입장을 성경을 통해 입증하는 것을 하나님의 기준이라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고, 하나님 입장에서 본 하나님의 기준이다. 분별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좋다.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이다.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암 7:7-8)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환상 가운데 다림줄을 가지고 계신 것을 보여주셨다. 다림줄은 건축업자가 건물을 세울 때, 건물이나 담이 지상으로부터 바로 직각으로 세워져야 하는데, 비뚤게 세워지지 않도록 정확한 각도를 지속적으로 체크하는 기구이다. 하나님이 그 다림줄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정확하게 건물이 지어졌는지 점검 하신다. 그리고는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다림줄에서 벗어나서 자기 마음대로 건물을 세웠다는 것을 보여주며,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다림줄 앞에 우리가 제대로 잘 서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다림줄을 가지고 우리를 판단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이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를 때가 아주 많다.


b. 하나님의 기준에 대한 착각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의 선한 삶을 요구한다. 내가 선한 삶이라는 윤리적인 부분을 분리해서 설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신앙과 윤리를 분리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윤리라는 단어는 한 번도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24) 신앙과 윤리를 분리한 적이 없다. 즉, 신앙과 우리가 생각하는 윤리 개념은 통합되어 있으며 분리되어 있지 않고 모두 신앙으로 다룬다. 신학적으로는 성경이 윤리를 다룬 적이 없고, 윤리체계를 다룬다고 말한다. 나는 왜 신앙과 윤리를 떨어뜨려서 생각하는 풍조가 생겨났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아마 철학의 영향이었던 것 같다. 정확하게 왜 윤리와 신앙이 떨어져서 신앙과 신앙에 걸맞은 윤리 개념이 생겨났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모든 사고는 두 가지를 분리해서 다른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모든 책과 설교와 주석까지도 그렇게 분리하고 있는데, 성경을 다시 보면 성경은 한 번도 분리한 적이 없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에 맞는 윤리 개념 자체가 바로 신앙인 것이다.

 

하나님은 땅과 노예 그리고 공중 위생과 고아와 과부를 사랑하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시고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윤리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신앙으로 인식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자신의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화해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윤리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신앙을 말씀 하신 것이다. 정직을 말씀하셨는데 윤리가 아니고 신앙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어떤 의식과 행위를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생각의 패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사고 패턴과 다른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계시다.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항상 자기가 편하고 유리한 쪽으로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우리가 잘못 인식하고 있는 신앙의 윤리 부분과 우리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 모두가 신앙이라는 통합된 개념으로 생각해야한다.

 

단적으로 이것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기준과 멀리 떨어져서 우리 위주로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c. 하나님의 기준은 성령의 비추심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기준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의중을 성경에 쓰여 있는 그대로 우리가 믿고 그 기준에 우리를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의 기준은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성령의 비추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성령이 비춰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기준을 발견하고, 또 우리 삶 가운데 실제가 되게 적용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기준이 가려지면, 절대 올바른 신앙은 불가능하며, 절대 회복이 안 된다. 부흥의 역사를 읽어보면, 하나님이 교회와 사회를 회복하실 때 가장 먼저 회복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다림줄)이셨다. 교회 회복, 영적 회복을 원한다면, 하나님이 성경 전체를 통해서, 2000년 동안 교회를 회복시키셨던 모든 과정의 첫 번째 단계인, 하나님의 기준이 바르게 회복되어야 한다.


d. 하나님의 기준에 대한 역사적인 순환


역사는 하나님의 기준이 보이면,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볼 수 있는 수많은 예들이 있다. 하나님의 기준 앞에 자신이 천리만리 떨어져 있는 모습을 보고, 통곡하고 애통해하며, 심지어 기절하고 떨기까지 하였다. 자신을 벌해 달라고 경찰서마다 사람들이 달려가 울며 회개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죽어 마땅하다며, 교인들에게 자신의 모든 죄를 드러내서 고백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기준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와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덮으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

반대로 하나님의 기준을 보지 못하면, 이러한 일이 성경시대로부터 지금까지 반복되어 나타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마태복음 23:29-31)


북왕국 이스라엘 말기 때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사야가 와서 이 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백성이 이사야를 죽였다.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관점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옳고 이사야가 틀린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 사건이 일어난 후 약 600년이 흘렀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조상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틀린 것을 잘 알았다. 바리새인들은 조상들의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자기의 조상들이 죽인 선지자들의 무덤을 새로 단장하고 비석을 꾸미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우리의 조상 때에 살았었다면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는데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마 23:30) 라고 말하였다. 자기들은 자기들의 조상들이 잘못한 것을 알았다. 그런데 자기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못 보았다. 자신들의 조상은 문제가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자기들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고,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리적으로도 바르기 때문에 문제없다고 생각하였다. 바리새인들은 호세아 시대의 백성이 틀린 것을 알았다.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그들은 그렇게 성경을 믿었다. 그들은 이사야가 하나님이 보내신 참 선지자였고, 다른 선지자들도 진실이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았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활동하였던 시대에 심판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들이 바로 자신들의 선조와 같은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 시대에는, 그 시대에 쓰여진 자기들에 대해 기록한 성경이 없었다. 그래서 자기들은 자기 나름대로 신앙 생활을 철저히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화 있을진저…….”(마 23:13, 15, 16, 23, 25) 하면서 “너희가 그 조상의 그 자손임을 스스로 증거한다.”(마 23:31)라고 하셨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이해가 안 되었을 것이다. 지금 비석을 새롭게 꾸미고 다시는 자신들의 조상과 같이 우둔해지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자신들을 가짜라 말하고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기서 문제는,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 조상들과 똑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들은 조상들과 다르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못 보았다. 자기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자기 조상들은 이사야를 죽였지만 자기들은 이사야보다 훨씬 크고 엄청난 하나님의 아들이 왔는데 죽였다. 이것이 보여야 한다. 자기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그 시대 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께 버림당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00년이 지났다. 우리 입장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잘못된 것을 알고 있다.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당연히 그렇게 알고 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된 것을 알고 있다. 성경에 나와 있으니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다. 지금 시대에 기록된 성경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에 우리가 맞는지 우리는 모를 수 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과 똑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

 

오늘날 문제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다 성경을 믿기 때문에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바리새인들이 잘못된 것을 알고 있다. 수없이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해 들었기 때문에 알고 있다. 그런데 자기가 하나님의 기준 앞에 멀어져 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과거 성경을 통해 이야기한 것을 알고 있지만, 현재 자신이 그 속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이것이 무서운 것이다.

 

구약시대 제사장부터 종교 지도자들 모두가 잃어버린 것이 있었다. 또한 예수님 시대에 종교 지도자들 모두가 잃어버린 것이 있었다. 틀린 신학이 심판을 부른 것이 아니다. 신학은 바른 신학이었다. 성경도 바르게 가르쳤다. 문제는 하나님의 기준이 가려졌기 때문이었다.


e. 하나님의 기준을 발견하는 것은 회개로 이어진다


이러한 하나님의 기준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기준을 본 사람의 첫 번째 반응은 하나님 나라의 첫 번째 관문인 회개로 이어진다. 역사적으로 항상 부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신앙의 본질과 하나님의 기준이 처음 보이기 시작하였을 때, 이 말씀 때문에 내 마음이 녹아져서, 쓰러져 기절 상태까지 갔었다. 하나님의 기준이 나에게 적용되고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나는 말을 잊었고, 눈물로 한 달을 살았다. 꿈을 꾸어도 내가 주님의 기준 앞에 천리만리 떨어져서 주님을 멸시하고 있는 것이 생각나서 밤새도록 울었다. 밥을 먹어도 내 눈물과 밥을 함께 먹었다. 반찬이 필요 없었다. 화장실에 앉아서도 울었다. TV나 다른 것을 볼 수도 없었다. 내가 주님을 멸시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 가운데, 나의 죄 때문에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 때문에 그 어떤 유희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 어떤 맛있는 것을 먹어도 그것이 즐겁지 않았다.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나를 보면 지옥에 떨어지는 나를 매일 경험하였다.

 

그렇게 하나님의 기준이 내 삶 가운데 세워지기 시작된지 수년이 지났다. 지금은 그때보다 약하지만 아직도 내 마음이 죽을 것 같다. 십자가만이 이 고뇌에서 희망을 주고, 생명을 주고, 예수 그리스의 십자가가 내 삶 가운데 함께 하심을 경험한다. 이 고뇌가 없다면, 십자가는 과거에 한번 일어난 단순한 구원의 문제로 끝나버리고 만다. 그러나 이 고뇌가 있다면, 현재도 십자가는 하루하루 순간순간 내 삶 가운데 실제가 되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내 속에 사시며,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실제가 시작된다. 이것이 십자가의 삶이다.

 

나는 하나님의 기준이 처음 내 마음에 자리 잡히면서 한 가지 결심을 하였다. 지금까지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책을 버릴 결심을 하였다. 모두 헛되어 보였다. 하나님의 기준이 없이, 성경에 대한 지식만 쌓아간 내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다. 3천만 원짜리 전셋집에 살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책값을 다 합해 보았더니 1억원 정도 되었다. 내가 큰 교회 담임목사로 갈 수 있는 기초가 되는 박사과정까지 공부하면서 내가 쓴 돈은 더 많았다. 이제는 학위도 필요 없었지만, 등록금을 모두 지불한 상태였기 때문에, 공부를 끝마치고 선교사로 나갔다. 학위 논문을 마치자마자, 나의 책 일부를 기증하거나 주변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고, 고물상에 모두 넘겨 버렸다. 속이 다 시원하였다. 학위도 아무 쓸데 없다는 생각을 가졌다. 신학공부를 하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내가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르고, 지식만을 구하는 공부를 하였는지 알게 되었다. 가장 소중한 지식은 바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인격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리고 지금까지 공부해 온 모든 나의 지식을 내 마음 속에서 지우고, 다시 하나님의 기준을 세우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9.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


하나님은 관념 속에 거하거나, 추상적인 분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볼 수 있게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며, 그 주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다른 보혜사를 보내셔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셔서 우리를 도우시는데, 바로 성령이다.

 

신약으로 넘어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며 유일한 주님이며 생명 되신 그분과의 교제 관계로의 발전하였다. 예수님의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로써,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하여 이 땅에 임재하시고, 친밀한 교제의 관계를 가졌다.

 

여전히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신앙의 본질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자로써 하나님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며, 하나님의 임재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와의 임재의 변화를 선포하시고, 신앙의 본질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자신의 삶을 통하여 친히 보여주셨다.

 

이제 더욱 실제적이고 친밀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길이 열렸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하나님과 친밀함이 열렸다.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더 이상 제사와 희생이 없이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신앙의 본질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말씀이 그의 삶 전체를 통해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것을 복음이라 부른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듯이 우리 또한 성령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10. 하나님의 관계를 최우선 순위로 여겨야 한다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의 의지로 결단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결단도 하나님의 인도가 있어야 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는 그 사람과 더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방해 요소가 있겠지만 사랑하는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에 우선순위를 두어야한다. 그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도록 하는 것은 중요하다.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의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 즉, 주님의 임재가 충만한 가운데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살게 되면,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게 된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계획 이상의 것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B. 첫 번째 영역 - 하나님 그분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사랑’의 관계


신앙이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이것은 첫 번째 하나님 그분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사랑의 관계를 의미한다. 신명기 6장을 흔히 쉐마 선언이라고 한다. 쉐마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하나님의 가장 큰 계명이다. 5절에는 우리가 어떻게 유일신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히브리적 사고에서의 마음은 생각과 의지, 감정과 생명 모두가 공존하는 인간의 전부로 표현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말씀은 생명까지 내놓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뜻은, 자기의 영혼과 인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힘은, 사람이 내놓을 수 있는 최대한의 것 또는 차고 넘치는 에너지나 노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급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세 가지 표현을 중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간의 태도와 정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1.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하나님은 한분이시다’25)는 고백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유일하신 분이심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가장 중심되고 신앙을 지배하는 내용이다.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한분으로 생각하고 주장할 수 있지만, 문자적으로 숫자를 강조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26) 성경에서 하나님이 유일한 분이라는 배경과 의미는, 하나님 그 분만이 자신의 모든 삶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신앙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유일하신 분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신은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이다.27)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의미는 이사야40 ~ 55장에서 여호와만이 하나님이고 인간들이 추구하는 다른 신들은 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사람들이 말하는 신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비해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유일신 개념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렘 2:11; 10:7; 16:20; 사 41:29; 43:10; 44:8; 45:5, 6, 14, 21, 46:9). 그리고 구약과 신약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유대교의 ‘쉐마(shema)’라는 신앙고백에까지, 모든 시기에 강력하게 주장되었다. 하나님은 유일한 신이기 때문에 그분을 우리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삼아야 한다.28)

 

신명기 6장 4절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고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이렇게 유일하신 하나님은 십계명의 제1, 2계명에 우상을 금지하고 이방잡신을 금지하는 계명(출20:2-4, 신5:6-8)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삼을 것을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12장 28 ~ 34절29)은 구약의 신앙의 본질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알려주는 본문이다.

 

한 서기관이 가장 첫째 되는 계명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신명기 6장 4절의 유대교 전통적인 신앙고백으로 답변하신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막 12:29) 이러한 예수님의 대답에 대하여 유대교 서기관들이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막 12:32)라고 예수님의 답변에 대하여 동의한다. 서기관의 동의에 대하여 예수님은 다시 그의 이해가 정확하였음을 확증하며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구약의 신앙의 본질과 하나님 나라를 결부시키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구약에서 내려오는 유대전통의 신앙의 본질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동일선상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이 구약과 다른 신앙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의 신앙의 본질을 말씀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인 것을 알 수 있다.

 

유일하신 하나님 개념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핵심이다. 유일하신 하나님 한분만이 자신의 삶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삶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선재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한 분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으로 넘어갔는데,30) 그것이 복음이다.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주저 없이 일치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계시자(revealer)이기 때문이다.31)


2.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


a. 세상에서 잘되는 것


세상에서 잘 되면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해서 주어지는 복으로 생각을 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복은 하나님이 복이시다. 물질이 주어진다고 복 받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라오디아 교회가 제일 축복 받은 교회가 되어야한다.

 

예수님은 부자들의 교회였던 라오디아 교회에게, 가난하고 가련하고 눈멀고 헐벗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주님을 문 밖에 세워놓았다.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으로 채워야지 세상의 것으로는 채울 수 없다.

 

그러므로 복은 하나님 그분이 복이다. 그분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친밀한 관계가 될 때, 하나님은 성경에 복으로 소개하신 수많은 것들을, 그분의 주권으로 우리에게 기쁘게 나누어 주신다. 우리는 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복의 주인이신 하나님 그분을 추구해야 한다.


b. 은사를 많이 받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은사가 나타나서 귀신을 쫓고 예언을 한다면서 사람들의 문제를 족집게처럼 잘 알아맞힌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은사를 무슨 영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는 영성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은사 중심의 신앙으로 빠지면 은사가 영적 계급으로 생각하고, 신앙 수준이 높은 사람만이 받는 어떤 것으로 착각한다.

 

은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높은 수준의 영성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은사를 사모하고 구하는 자에게 후회 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많은 은사를 받은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는 공식은 잘못된 편견이다. 그래서 은사에는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에 바울은 사랑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러한 은사가 나타나면 도리어 그것은 화가 된다. 귀신을 쫓고 예언을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고 말씀을 하셨다.


c. 의식을 잘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이고 의식 즉, 예배나 봉사와 같은 것은 본질을 담는 그릇이라고 하였다. 의식을 아무리 많이 잘 하고 정성을 들였다 하더라고, 그 속에 본질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다.

 

30년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주일성수 하였더라도, 주일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분과의 친밀한 만남을 통해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이는 친밀한 교제가 없었다면, 주일성수 한 것이 아니다. 예배시간에 교회에 나아가 앉아 있었더라도,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것을 기준으로 우리를 평가하시고, 우리를 초청하신다.

 

그분의 의중이 곧 법이고, 그분의 생각이 곧 진리이다. 우리는 그분의 법과 진리 안에 있을 때에 그 분 앞에서 옳다 인정받을 수 있다.

신약시대 바리새인은 1주일에 2번 금식하며 하나님을 끔찍이 많이 섬겼다. 그러나 예수님께 버림을 받았다. 종교적인 모양은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표현들이었다. 지금 우리 시대에 바리새인이 있었다면, 그 어느 누구보다 열정적인 모습으로 인상 깊은 신앙생활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 즉, 바리새인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동기와 생각을 주님은 보셨다.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예수님의 평가는 아주 잔인하게 들릴 정도로 혹독한 말씀들을 바리새인들에게 하셨다.

 

그러므로 외적으로 표현되는 종교적인 모습이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지만, 그 외적 표현을 잘 하는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외적으로 종교적인 ‘깊은 정성’으로 사랑을 대체할 줄 안다. ‘율법주의’ 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교묘하게 대체할 줄 안다. 그러므로 외적 표현은 본질을 담는 그릇으로써 아주 중요하지만, 쉽게 타락할 수 있다.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말장난 같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그리고 동기를 중요하게 여기신다.


3.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려면 인격체이신 주님이 비춰져야 하고, 그 분과 만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우리 시대에 가장 오해되는 것이 이 부분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한 마디로 주님이 나의 유일한 모든 것 되시는 신앙을 말한다. 인격체 되신 하나님이 나의 삶의 목표요 목적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막12:29)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일한’이라는 단어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서 유일한 주님이 아니면 그분은 우리의 주인이 아니다. 주님만 사랑해야지 주님도 사랑하고 다른 것도 사랑하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아내도 사랑하고 옆집에 있는 아줌마도 사랑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아니면 한 달 중 29일은 아내를 사랑하고 하루만 다른 여자를 사랑하면 이것은 간음이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군대를 조직하고 그를 추적한다. 다윗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 자신의 힘이요, 방패요, 요새임을 믿었다. 다윗이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시 18:1)라고 고백하였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읽을 때 이러한 신앙의 고백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우리도 당연히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라고 고백을 한다. 그러나 다윗은 이 고백을 단순히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만이 유일한 힘이라 고백이었다.

 

헨리 블렉가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그 자체는 어렵지 않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유일한 주님을 향해 존재를 다 걸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주님만을 사랑한다면서 우리는 주님도 사랑하고 세상에서의 성공도 사랑한다. 주님도 사랑하고 목회 성공과 성장을 사랑한다. 이러한 비유가 틀렸다고 하기보다 마음의 자세 문제를 가지고 비유한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듯한 외적으로 나타나는 수많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이 있지만, 우리 생각의 마음을 보시고 동기를 살피시는 하나님의 기준 앞에, 진실한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우리 속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한다. 예수님은 둘째 계명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말씀하셨다(마 22:39). 사도 바울은 이웃을 향하여 자신이 종 된 삶을 살았다(고전 9:19).

 

우리는 우리 이웃을 사랑함이 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전 존재로 사랑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연스럽게 이웃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실제로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게 될 때, 그것이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나는 하나님이 한분이시라는 의미를 현대적인 용어로써 “하나님 그 분만이 나의 삶의 유일한 모든 것”으로 실제적인 용어로 정의하고 나서, 하나님이 나의 유일한 모든 것 되심으로 인해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나는 하나님이 나의 유일한 모든 것 되신 사실 때문에, 수많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 되는 것은 쉽지만, 유일한 모든 것 되는 것이 무척 힘들고, 그것을 위해서 내 마음 속의 얼마나 많은 쓰레기들을 치워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주님이 유일한 모든 것 되는 것의 실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4. 우상숭배


십계명에 나오는 처음 네 계명을 통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우상숭배를 미워하시는지 잘 나타내 보이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유일한 모든 것 되시는 사랑의 관계를 원하신다. 이러한 관계를 방해하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성경에서의 우상숭배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잔인하게 진멸하도록 하신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 때문이며,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그들과 똑같이 하면 동일하게 진멸하겠다는 의지가 있다(신 7:6-7).

 

두 번째는 하나님 그분이 유일한 모든 것 되지 않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도 섬기고 다른 것도 섬기는 일을 하였다. 나누어진 마음의 문제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유일한 모든 것 되지 않은 이유는 경제적인 부분과 개인적인 야망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 될 수 있지만, 유일한 모든 것 되는 것은 어렵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되기 원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유일한’이라는 단어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재능으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성공을 갈망한다. 자신이 성공하면 하나님을 위해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가슴에 손을 대고 하나님 앞에 정직해져 보자. 정말 성공하고 싶은 야망이 없이, 순순한 마음으로 성공으로 인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있는가? 성공하면 주위로부터 인정받게 되는 상상을 하지 않는가?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교회 성장을 부르짖고 하나님의 뜻으로 선포한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가슴에 손을 대고 하나님 앞에 정직해져 보자. 교회가 성장하고 커지게 되면, 자신이 사람들과 다른 목회자들에게 인정받게 될 것이라는 상상을 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는가?

 

나는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다루실 때, 한번이라도 큰 교회 목회를 하게 되는 생각에 따라오는, 주변으로부터의 인정이, 바로 나의 야망인 것을 보여주셨다. 즉, 수없이 성공 목회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나는 그렇지 않은 목회를 한다고 생각하였지만, 교회 문으로 들어오는 성도의 숫자에 의해 나의 마음이 기쁘기도 하고 실망되기도 한 나의 모습을 보며, 내가 성공 목회를 나도 모르게 추구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나의 내면에서는 성공을 끝임 없이 추구하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하나님 그분으로 만족하는 법을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잘 되어서 주변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있다. 그것을 자기욕심이니, 세상 사랑이니 하며 세상적이라 설교한다. 과연 세상 사람들과 신앙을 가진 성도와 목사가 다른 것이 뭐가 있는가? 세상 사람들이 성공하여 인정받으려는 것이나, 교회에서 성공하여 인정받으려 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는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 심지어 하나님께 인정받자고 신앙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성공이라는 야망이 가득하여 언어적 마술을 부리는 것이다. 성경은 성공하라 하지 않고 사랑하고,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에 자신의 삶을 조정하여 동참하는 것을 말하였다. 마음 속에 신앙이라는 것이 조금 있느냐 많이 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

 

세 번째, 인격적인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이다. 출애굽 광야시절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이 진멸당할 뻔하였다. 이유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고 자신들의 전통과 자신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식하였지만, 하나님은 인격적이고 직접적인 만남의 교제가 없는 대체되는 모든 것을 우상으로 인식하신다. 하나님이라는 어떤 대체되는 형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격이 들어갈 곳에 전통과 교리와 성경 지식이 대체해버린다면 이미 하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인격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과거에 교리와 지식이 인격을 대체하고 있을 때. 지식적으로는 잘 설명할 수 있었지만, 이것이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인격적인 하나님 그 분을 추구해야 한다.


C. 두 번째 영역 - 하나님 그분을 ‘아는 것’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이것은 두 번째 하나님 그분을 아는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다. 자신을 계시하심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적인 지식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안다’라는 단어의 “야다([d'y:)”는 우리나라 말에 있지만, 자주 오해되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경험으로 인한 친숙성’으로써 우리가 사람을 “안다”라고 말할 때 “안다”는 의미이다. 아담이 하와를 “안다”라고 성경은 말하는데, 성경에는 ‘안다’라는 단어를 ‘동침한다.’라고 번역을 하였다. 그만큼 지식을 넘어서서 가깝고 친숙한 관계를 가지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아는 것은 인식과 이해의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이고 체험적인 영역에까지 연장된다.32) 즉, 하나님의 인격과 나의 인격이 접촉하여,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아는 것을 말한다.

 

베드로가 예수님 안에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인 것을 발견했던 것처럼,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그분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을 “안다”라는 의미가 신학적으로 그리고 지식적으로 어떠한지 글을 통해 소개하였다. 수많은 서적들은 이러한 지식적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어떤 것인가를 소개하고 있지만, 인격적이고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실제에 있어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그 자체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보고 싶다. 이론적으로는 모두 안다. 문제는 실제이다.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신앙이 아니다.


1.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문제


a.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오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하면 이것은 당연하다고 생각을 한다. 문제는 주님을 아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아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짜 신앙에서도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것을 다른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전도를 배운다. 그러면 우리는 이론적으로 배운 것을 가지고, 자신이 전도를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배운 것을 가지고 실제로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순종하여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전도이다. 이러한 사역을 반복적으로 함으로 비로소 전도가 무엇인지를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도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많이 알고 있는 것이지 전도가 아니다.

 

주님을 아는 것도 우리가 성경공부라든지 설교를 통해서 배움으로 실제로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다. 율법주의 사고에서는 주님을 안다는 것을 주님에 관해서 이론적으로 아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성경을 이론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면, 자기는 하나님을 더 잘 알고, 하나님의 뜻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 박사들인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요 5:37-38)라고 말씀하셨다. 즉, 한 마디로 하나님을 전혀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신학적인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지식은 삶의 변화를 주지 못한다. 이것에 대하여 마틴 로이드 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 사람을 잊을 수 없다. 내가 그를 만날 때 마다 그는 늘 자기가 위대한 성경 학자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가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 학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유감스럽게도 신약성경에 있는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런데도 성경연구는 그의 장기였다. 이것은 내가 두려워하는 일이다. 누구든지 기계적 의미에서 성경학자가 될 수 있다. 섹스피어를 분석하면서 시간을 보내듯이 성경을 분석하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33)


b. 하나님을 아는 것


성경에서 말하는 주님을 아는 것은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다르다.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이 자서전을 통해 그 저자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아는 것이라면, 인격적인 주님을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서 실제로 아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자서전을 읽고, 그 저자에 관해 아무리 상세하게 안다 할지라도, 그것이 곧 그 사람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을 아는 것은 그와의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나서, 그는 경험된 하나님을 이름을 지어 불렀다. 지식으로 하나님 그분을 안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자신이 알게 된 하나님의 이름들을 불렀다.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서 주님에 관해 아무리 많은 것을 안다 할지라도, 그것이 곧 주님을 아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기록인 반면,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유일하신 신이며, 살아 계신 인격체이시다. 주님을 아는 것은 그 분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주님을 아는 것은 성령의 조명으로만 가능하다. 인격적인 주님을 알게 될 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준다.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은 연구와 교육을 통해서 습득되는 반면, 주님을 아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셔야만, 우리는 주님을 알 수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 1:17)


이 기도는 믿음과 사랑에서 뛰어난 에베소 교회를 위한 사도 바울의 기도이다(엡 1:15). 여기에서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말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고 믿게 해달라는 말이 아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더 알게 해달라는 말이다. 즉, 우리가 살펴본 것과 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를 위해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pneu'ma, 영 혹은 성령)은 지혜와 계시의 성령이라고 번역해야 더 옳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스러운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내려주셔서 하느님을 참으로 알게 하시고” (공동번역 개정판, 엡 1:17)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성령의 조명으로만 가능하다.


c.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수단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중요하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신앙의 본질인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기 위한 수단이다. 하나님에 관한 바른 지식, 즉 바른 신학이나 바른 교리는 매우 중요하다. 만약 우리의 신학이 왜곡되거나 잘못되어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없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데 방해를 받고 있다. 심지어 어떤 성도들은 자신들의 체험만을 신뢰하며, 그 체험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고자 하는 배우는 자세나 지도자들의 조언을 듣고자 하는 겸손함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들은 반드시 미혹된다.


“내 백성이 지식(t['D')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 4:6)


주님에 관한 바른 지식이나 신학은 주님을 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매우 훌륭한 성경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하나님을 모를 수 있다. 하나님의 길이나 마음을 전혀 모를 수 있다.  이론적인 지식 그 자체에는 어떠한 생명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변화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또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아무리 많이 전해도 그 자체가 절대로 사람들을 살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수단이다.


2.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신다.


a. 현현(Theophanies)과 현시(Epiphanies)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실 때, 현현과 현시를 통해 나타내 보이신다. 아담과 하와는 날이 서늘할 때 하나님이 동산에서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창 3:8).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나타나셨다(창 15:1-21; 17:1-21; 18:33; 26:2-5, 24; 28:12-16; 32:24-32). 시내 산에서 하나님은 가시덤불에 나타나셨다(출 3장). 이사야와 에스겔의 부르심 가운데서도 나타나셨다(사 6장, 겔 1장).


b. 천사


하나님은 주의 천사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천사는 하나님의 대표자일 때도 있다. 즉, 천사를 본 것을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창 16:13; 삿 6:22; 13:22). 또한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일 때도 있었다.34) 천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가운데 나타나고 존재한다.35)


c.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은 하나님의 얼굴을 통해서 자신을 보이신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감정의 표현은 얼굴을 통해 집중되어 있다.36)  하나님의 분노는 ‘얼굴을 돌린다.’와 ‘얼굴을 감춘다.’로 표현되고, 하나님의 기쁨은 인간이 가지는 얼굴 표현을 모두 사용한다. 또한 “그의 얼굴의 때”(시 21:10)와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하는 브니엘이라는 이름과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난 것을 말하는 모세는(출 33:1, 민 12:8; 14:14),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시는 때를 의미한다.

 

얼굴은 하나님 자신(사 63:9)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인격(신 4:37) 을 가리키는 대용어로도 쓰인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은 직접적으로 볼 수 없다(출 33:20-23; 왕상 19:13).


d.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계시하지만, 그의 피조물들도 그분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시 29:1; 수 7:19; 사42;8; 48:11). 이 영광은 하나님이 독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분의 신적인 권능을 구성하는 특질들의 총체라 할 수 있다. 영광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하는 거룩함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거룩함을 나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가시적인 연장물이다. 영광은 ‘드러난 거룩함(die aufgedeckte Heiligkeit)’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백열등처럼 빛나는 영체”이다.37) 하나님의 영광을 구름이라는 단어로 더 자주 사용되고(출 16:10, 40:36-38), 구름을 뚫고 나타나는 영광으로도 묘사되었다(출 14:4-17). 영광은 하나님의 현현의 구체적인 형태, 하나님의 임재로 인식한다.38)


e. 말씀.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표현은, “여호와의 말씀이 ~에게 임하니라”(창 15:1; 삼하 7:4; 왕상 6:11; 17:2; 예언서들)이다. 이렇게 계신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선지자이었다.


f. 계시의 결과 계약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여 어떤 분이신지 나타내 보일 뿐만 아니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선택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는 것을 계약하시기까지 하신다.39)


3.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계시하신다. “야웨(hy:/hy)”라는 이름은 구약에 6,500번 이상 나오고, “엘로힘(!yhiloa>)”이라는 단어는 2,500번 이상 나온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며 구약의 중심이다.40)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말씀과 현현과 선지자를 통해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계시하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계시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자신이 임재할 것을 말씀하셨으며(출 33:19; 34:5),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장소를 성별케 하시기까지 하셨다(출 20:24).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비밀에 붙여두지 않고,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전해주셨다(출 3:13).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오용하는 것에 대하여 혹독한 징벌을 가할 것이라 경고함으로써(출 20:7)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야 함을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이름은 친히 인간과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하나님의 활동을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41)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가치 있게 여기시고 우리에게 계시해주신다. 스티븐 호돈은 이러한 하나님의 이름은 3가지로 구분하였다.


 첫째, 이름표 이름으로써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이름들이다…….  둘째로, 하나님 자신을 정확하게 드러내시기 위하여 이름을 계시 하신다……. 셋째로,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공적인 명성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의 평판을 나타내는 것이다.42)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 필수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시 3:1; 6:1; 7:1; 12:1). 하나님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지식적으로 아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경험한 하나님을 친밀하게 부르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더욱 친근하고 친밀감을 형성하는 단어인 ‘아바(Αββα)’라는 단어로 불렀다. 아람어로 ‘아바’는 아빠라는 단어로써, 구약에서 한번, 외경에서 5번밖에 언급 안 될 정도로 사용을 하지 않는 단어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라 불렀다. 아빠라는 말을 헬라어로 ‘파테르(πατήρ)’로 번역하여 우리 성경에 ‘아버지’ 라는 단어로 많이 등장한다(마 11:25-27; 26:42; 막 14:36; 눅 10:21-22; 23:34, 36; 요 11:41; 17:1). 그리고 이 전통은 초대교부와 지금까지 내려온다.

 

하나님의 이름은 항상 뜬금없이 갑자기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하나님의 일하심과 함께 이름을 계시하신다. 또한 하나님의 일하심 즉, 사역 이후에 경험된 하나님의 이름을 고백하였다. 아브라함은 항상 하나님의 일하심의 사역과 관련하여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갔다. 그럴 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새로운 이름을 고백하였다.

 

나는 전도사 시절부터 목사가 되어서까지 교회의 큰 행사나 주일예배가 끝난 다음에 오는 허전함을 때때로 경험하였다. 그 허전함 때문에 맛집을 찾아다니기도 하였지만, 사역 뒤에 오는 허전함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어떤 목사님은 주일 저녁이 되면 그 허전함 때문에 사역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을 가지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나의 사역의 자세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사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다. 나의 허전함은 바로 나의 잘못된 사역의 자세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역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 그분을 경험하고 알아지지 않았다면 나는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 없는 사역을 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사역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고 발견한다.


4. 하나님 같은 신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야웨 같으신 신이 누구신가)


성경은 하나님과 비할 바 없는 신이라 단언하는 표현을 “야웨 같으신 신이 누구인가?”(출 15:11; 시 77:13-15; 시 89:6; 미 7:18)라고 한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출 15:11)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는 수많은 표현들 가운데 한 가지일 뿐이다. 성경은 하나님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다루고 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알 수 있다. 이 지식을 기초로 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을 통해 우리의 신앙 생활 가운데 경험하여야 한다.

 

1999년쯤, 김준곤 목사님의 사위가 자신의 장인의 인상에 대하여 나에게 이야기 한 것을 기억한다. 그는 그의 아내가 김준곤 목사님의 딸인지 모르고 사귀었고, 한국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김준곤 목사님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결혼하였다. 그리고 한국에 오면 항상 처갓집에서 며칠 간 지냈다. 이른 새벽이 되면 김준곤 목사님은 일어나서 자신의 서재로 가서 오랫동안 문을 닫고 있다가 아침이 되어 문을 열고 나오는데, 두 눈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다음날도 동일하였다. 어떤 때는 찬양 소리가 났고, 어떤 때는 기도 소리도 들렸다. 그래서 며칠 그러다 말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그가 머물고 있는 2주 동안 매일 똑같이 서재에서 나올 때마다 두 눈에는 눈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여러 차례 한국의 처갓집에서 머물 때,  김준곤 목사님은 늘 그렇게 아침을 보내는 모습을 보았다. 그것을 보고 장인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었고 존경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나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과 교리적이고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며칠 새로운 진리나 깊이 있는 성경말씀 때문에 감격해할 수 있지만, 매일 그럴 수 없다. 자신에게 당면한 문제를 가지고 눈물 흘리면 며칠 동안 울며 기도할 수는 있지만, 매일 그렇게 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은 매일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


a. 구원의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하나님을 경험한 것은 구원자였다.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호 13:4) 하나님은 이스라엘 개개인들과 나라의 원수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성경 기자들은 “구원은 주께 속한 것이니”(시 3:8; 욘 2:9)라고 고백한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과 관련하여 죄로부터의 구원을 먼저 전제한다. 신약 성경의 3분의 2가 죄로부터의 구원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성경 전체를 통하여서는 민족의 패배, 기근, 가난, 두려움, 질병, 귀신들림, 육신의 죽음과 같은 재난에서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다(신약성경의 3분의 1이 이러한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구원이란 인간이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의식에 도달하는 것이다.43) 그것이 죄이든 다른 총체적인 문제이든 모두 동일하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시 3:8; 욘 2:9). 하나님을 유일한 구원자로 인식하는 것은 신앙의 출발점이며 처음 만나는 하나님에 대한 인상이다.

 

우리의 신앙의 출발은 이렇게 구원하시는 하나님, 구원하시는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인식하는 것이다. 단순히 구원에 대한 교리를 이해시키고 영접기도하게 하여 교회로 인도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핵심이 아니다. 구원은 인격체이시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의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에 대한 핵심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b. 창조의 하나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먼저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창조의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는데, 6일 동안 창조하셨다. 이사야 40 ~ 66장과 잠언 8장에서는 창조의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실 뿐 아니라, 그분은 지혜로운 분이시며 세상을 운영하시는 주권자이시다(욥 38:2-39:30; 시 104:27-30). 창조의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가 피조물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 창조자가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수많은 자기중심주의가 난무하고 있다. 동양적 사고 방식에서는 창조자에 대한 인식에서 신의 존재 증명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지는 반면, 서양적 사고 방식으로는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부터 필요하고 철학적인 접근이 필요했었던 이유이다. 성경은 동양적 사고방식으로써, 신의 존재 증명이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존재하고 계시며, 창조주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다.


c.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본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거룩(v/dq; 또는 vdoq;)하신 하나님이다. 가장 많이 강조되고 가장 많이 언급되었다.44)

 

첫째, 거룩이 하나님에게 사용될 때, 거룩은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들로부터 구별시키는 창조주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신적인 존재의 속성의 신비로 해석할 수 있다. 거룩은 어떤 활동이 아니라 존재를 가장 가깝게 묘사한 것이다. 이것은 피조된 세계와 분리하고 구별시키는 창조자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가리킨다.45)

둘째, 거룩이 백성에게 사용될 때, 거룩은 백성이 순수하고 깨끗하며 의롭고 긍휼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과 같이 백성도 거룩 하라는 하나님의 요구와 부르심을 가리킨다.46)

 

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고 방식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호성을 알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더욱 모호한 개념의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한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새벽기도와 성경공부 모임에 거의 참석하지 못한다. 그것은 나의 체력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나는 언제나 혼자서 조용히 인격적인 하나님 그분을 추구하고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의식을 추구하며 성경을 연구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은 나의 스타일이다. 또한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하게 뒷받침하는 것이 최전방 지역에서 내부자 운동 사역하는 선교사라서, 기독교인들과 교회까지도 거리를 두고 사역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임재가 강렬하게 내게 다가와서 하나님의 높으심이 강렬해질 때가 있다. 성령이 충만하게 나를 주님께로 인도하실 때, 주님의 높으심이 비춰져 나를 덮고 그분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피조물을 다스리시며 나와 구별되어 나의 하나님 되심이 강하게 비춰진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거나 성경을 읽거나 스스로 공부하다가 혹은 그 연장선상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을 하다가 선명하게 비춰지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감격의 눈물을 쏟으며 그 감격과 성품의 높으심 때문에 숨이 막혀서 헉헉 거릴 때가 있다. 이것을 몇 시간 동안 지속적한적도 있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창조의 하나님, 세상 그 무엇보다 높으신 하나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신 것 때문에 감격의 마음을 넘어서 나의 육신이 감당을 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거리며 하나님의 성품에 깊이 빠져 기쁨의 시간을 보낸다. ‘주님 같은 분이 어디 있는가?’, ‘높으신 하나님’, ‘부활의 영광’, ‘창조의 왕’과 같이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성품이 비춰올 때, 헐떡거리며 주님의 높으심을 찬양한다. 시편 119편 131절에는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라고 하였다. 나는 하나님 그분의 성품 때문에 감격하여 헐떡인다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한다. 처음에는 하나님 그분의 성품 때문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도 함께 보며, 나는 그 감격에 헐떡인다. 천둥과 번개를 활자에 담을 수 없듯이, 나의 거룩하신 하나님을 나는 활자에 모두 담을 수 없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이고 가장 소중한 시간들이다.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은 나를 풍요롭게 한다.


d. 사랑의 하나님


사랑이라는 단어는‘아하브(bh'a 또는 bhea;)’로써 인간의 사랑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신 7:-9; 13:23; 23:5; 왕상 10:9). 솔로몬과 고레스와 신명기에는 주께서 나그네를 사랑하시고(삼하 12:24; 사 48:14; 신 10:18), 예루살렘을 사랑하시고(시 78:68; 87:2), 의를 사랑하시고, 의롭게 행하는 자들을 사랑하시고(시 11:7; 37:28; 45:7; 99:4; 잠 3:12; 15:9; 사 61:8; 말 2:11), 조상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의 자손을 선택(신 4:37; 10:15)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남편으로 사랑하였고(겔 16:8; 호 3:1), 아버지로서 사랑하셨고(호 11:1) 이스라엘은 하나님 눈에 보시기에 소중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구속하시고 새롭게 하셨다(사 43:4; 63:9; 습 3:17).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 얼마나 깊냐 하면, “내가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렘 31:3)고 하시지만,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지면 하나님은 “내가 저희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호 9:15)고 말하신다.

 

사랑과 관련된 또 다른 단어인 ‘헤세드(dseje)는 번역이 까다롭고 광범위한 단어이다. 칠십인역에서 은혜로 번역하지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힘, 성실, 꾸준함이라는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인자, 연민, 긍휼, 은혜라는 개념이다. 사랑의 다른 단어인 하눈과 라함, 라하밈 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개념 이상 되는 크고 놀라운 사랑의 크기를 표현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랑의 개념을 가지고 계시다. 우리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뿐만 아니라, 측량하지 못하는 사랑의 크기를 가지고 계시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할 때가 많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랑의 크기와 넓이를 알아가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뼈에 사무치는 사랑 때문에 오열을 할 때가 있다. 이것은 첫사랑보다도 더 애타고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데,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강렬한지 내가 느끼고 내가 알아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글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두 눈에는 눈물과 기쁨이 가득하여 몇 시간동안 그 사랑에 빠져 눈물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바쁘게 할 일들이 있어 일을 하면서도 나는 그 사랑에 빠져 사랑의 마음의 끊을 놓지 않고 그 사랑 때문에 흐느끼며 울면서 일을 다 끝낸 적도 있다. 나의 이런 자주 있는 주님과의 사랑의 감정 때문에 훌쩍이고 있으면, 나의 아내는 조용히 휴지를 내 옆에 갖다 준다.


e. 진노의 하나님


하나님의 진노(@/rj;)는 질투와 복수라는 단어와 연관이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죄 때문이다. 다른 신을 섬기는 것(출 32; 민 25; 신 2:15; 4:25-26; 9:19; 삿 2:14; 왕상 11:9-10; 14:9, 15; 왕하 17:17-18), 피를 흘리는 것(겔 16:38; 24:7-8), 간음(겔 16:38; 23:25), 사회적인 불의들(출 22:21-24)이다. 비극적인 일, 민족적인 재난들,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죽는 것들은 사람들에게 수수께끼가 되었다. 그래서 고통과 재앙은 흔히 하나님의 징벌로 보아졌다(왕하 23:26-30; 대하 35:20-25; 욥 2:10; 시 44:8-22).

 

하나님의 진노는 진멸을 의미하였다.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리라”(출 32:10. 민 16:21; 신 7:4)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진노는 완전한 도말이 의도되어 있어서 무시무시하고 두렵고 떨리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진노를 억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악과 동일시되지 않고 불과 같이 중립적인 것이다.

 

우리 시대 가장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 바로 진노하시는 하나님인 것 같다. 하나님의 기준 앞에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할수록, 부흥과 회개는 가까울 것이다. 부흥 때마다 회복되어 지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유명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은 부흥의 시작 메시지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인도로 인해 하나님의 기준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준 앞에 한없이 미달된 나 자신을 보고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 죽어지는 경험들을 하였고 기절하기까지 하였고 몸이 견딜 수 없어 병원에까지 갔었다.  이러한 회개는 하나님의 성품을 선명하게 보게 될 때 가능해진다.


f. 공의의 하나님


시편 기자는 “하늘이 그의 공의(qd,x,)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시 50:6)라고 말하였다. 이사야는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은 개인들(창 16:5; 31:53; 삼상 24:12, 15)과 가족들(삼상 3:13) 열방들(창 15:14; 사 2:4)과 자기의 백성(시 50:4; 67:4; 사 3:13; 33:22; 겔 36:19)을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집단을 심판할 수 있다.

 

이렇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3가지를 가지고 계시다. 권세와 주권, 의롭고 공정한 결정들, 모든 증거들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47)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항상 의롭고 공평하다(창 18:25; 시 9:4, 8; 67:4; 72:2; 75:2; 96:10).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을 뚫어 보시고 동기들과 진정한 성품을 알고 있다. 그래서 사무엘에게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판단은 항상 바르고 정확하고 그것이 바로 법이고 정의이다.


g. 구원의 하나님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죄이다. 우리는 모두 범죄 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사 53:6) 죄 사함과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다(사 53:4-5; 시 51:3-4; 130:3-4; 막 2:7; 눅 5:21; 7:49). 하나님은 죄 사함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셨고 지금도 하신다. 성경은 죄 사함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고 영적이고 정신적인 정화와 치유로 간주하였다.48)

 

죄 사함과 구원 그리고 회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회복이 목적이다. 죄 사함을 통해 천국을 약속받는 것에 초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 또한 회개를 통해 바른 생활로의 전환에 초점을 두어서도 안 된다. 그것들은 부산물이다. 죄 사함과 회개는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h. 축복의 하나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4-27)


성경에서 축복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은 안식이다. 사람은 쉬고 충전이 필요한데, 하나님이 그것을 축복하셨다. 그리고 인류 전체와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2, 28)는 축복과 물과 공중과 땅을 채우라(창 1:22, 28)는 축복과 음식의 축복(창 1:29-30)을 주셨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저주가 있다. 또한 축복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축복은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안전케 하시며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끊임없이 돌보시는 것이다.49) 축복과 함께 “은혜로우시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베푸시는 것을 의미한다.50)

 

제사장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선언한다. 이것이 유대 회당 예배에서 축복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는데, 이것은 오늘날 목회자로부터 예배 마지막에 축복하는 기원이 된다. 이것은 제사장의 능력을 통해서 주술적으로 능력과 건강 또는 부를 수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고 공급해 주실 것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기도이다.51)


5.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영광은 모든 사람이 마음 속에 흠모하고 보고 싶어 하고 경험하고 싶어 하는 관계적인 아름다움이다. 히브리어 ‘카바드’(db'K;)의 기본 의미는 ‘무겁다’인데, 문자적 의미로는 드물게 사용되고 오히려 비유적인 용법으로 더 많이 사용된다. ‘명예로운, 존경스러운, 영광스러운, 미화된’등이 일반적인 번역이다. 어떤 사람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은, 그의 고유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것이며, 공개적으로 그 특징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영광’이라는 말이 하나님에 대해 사용되는 것은 주로 하나님의 존재나, 성품을 사람이 알 수 있도록 나타나는 현상을 가리킬 때에 사용되었다.

 

하나님에 대해 사용될 때 이 단어는 하나님에 대한 인상을 심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 단어는 하나님의 현시(나타냄)을 지칭하며 임재를 말한다(출 14:4; 29:43). 출애굽기 40:34 이하에서 구름이 회막을 덮고 하나님의 영광이 회막의 내부를 가득 채웠으며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개인적인 환상들을 보았다(겔 1:4).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이름과도 결부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다른 신에게 주기를 거부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은 소망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시 72:19; 57:5; 57:11; 사 66:18-19). 이 점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구원 행위와 관련된다(사 40:3). 이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실 것이고(슥 2:8-9),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에 속하게 될 것이다(사 43:7).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에 대한 반응은 예배이다.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앞에, 그리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으로 인해 찬양해야 한다.5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다는 말에서 영광이라는 말은, 이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사용된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찬송과 가치를 돌려드리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은 가볍게 또는 소홀히 대해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장 높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을 "무겁게", 즉 "존귀하게" 여기고 그에 합당한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가치 있는 분"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마땅히 찬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지존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가치를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53)


D. 세 번째 영역 -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원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것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이것은 세 번째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알리시고,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항상 일하시는 분이시다. 모세와 아론이 애굽의 바로에게 갔을 때, 바로는 비웃으며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고 하였다. 열 가지 재앙들이 애굽을 덮쳤고 그 결과 애굽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출 7:5, 17; 8:10, 22; 9:14-16, 29; 10:2; 11:7; 12:31-32; 14::4, 18, 30). 애굽이 믿고 의지하였던 신들과 비교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신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누구든 하나님 안에 거하고자 원하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백성으로 속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계획하시고 이끌어 가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통하여 그 일을 이끌어 가시는 것을 기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다.


1. 자신의 백성을 세우시는 이유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s WrPes'y_ ytiL;hiT] yli yTir_x'y: WzA![' ”(사 43:21).


이 구절에서 ‘찬송’에 해당하는 ‘테힐라(hL;hiT)’는‘할랄(ll'h)’(자랑하다, 칭찬하다)의 명사형으로서, ‘세다, 계산하다, 하나하나 열거하다, 선포하다’라는 뜻이다. 이 구절을 다시 번역하면,“이 백성은, 나를 위하라고 내가 지은 백성이다. 그들이 나의 자랑거리들을 생각하며 나열하고 선포하게 하려 함이니라”는 뜻이 된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세우고 유일신 하나님이 되시는 이유는 자신의 백성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지식을 통해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직접적이고 경험을 통하여 알기 원하신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의 유일한 모든 것 삼고,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면, 하나님을 자랑하고 찬양하고 그 위대하심을 높이는 것을 쉬지 않게 된다. 또한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성품에 매료되어 그 성품을 본받게 된다. 하나님이 원하는 신앙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신의 것 삼으신 이유가 이것이고, 시대마다 주도적으로 일하시고 이끄시어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신앙이고 사역이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말씀하고 계신 이것이 비춰져야, 신앙이 변하고 사역이 변할 수 있다.


2. 모든 민족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 원하신다


시편 67편에는 하나님이 전 세계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며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망과 비전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복 주시기 원하신다. 그리고 모든 민족으로부터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 삼으시고 구속하시기 원하신다.


3. 하나님의 질투


성경에는 인간이 갖고 있는 질투가 등장하고, 하나님의 질투가 등장하는데 모두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지신 질투를 의미할 때는 인간적인 질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질투라는 것은, 성서적인 원리로는 “하나님께 속한 소중한 것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열심”으로 정의한다. 히브리어 ‘카나(aN:q')’54)는 하나의 단어인데, 한글 성경에는 이것을 담을 수 있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질투(jealousy)’와 ‘열심(zeal)’으로 다르게 번역되어 있다. 성경에 ‘하나님의 질투’가 나오면,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해해야 하고, 또한 ‘하나님의 열심’이 나오면, ‘하나님의 질투’로 이해해야한다.


a. ‘하나님의 질투’로 번역


1) 하나님의 이름이 질투이다


“너희는 다른 신에게 절을 하여서는 안 된다. 나 주는 '질투'라는 이름을 가진,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새번역, 출 34:14)


하나님의 이름은 많이 있다. 여호와 닛시, 여호와 샬롬, 여호와 라파 등등 많이 있다.  많고 많은 하나님의 이름 중의 하나가‘질투’이다. ‘질투라 이름 하는’하나님의 이름이 ‘질투’이다.


2) 하나님의 성품이 질투이다


구약의 모든 율법을 압축하면 십계명인데, 그 십계명의 처음 두 계명이, ‘질투의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새번역, 출 20:3-5)


‘질투’는 그만큼 하나님의 우선적이면서, 중요한 성품이다.(신 4:24; 6:15; 수 24:19; 사 59:17; 63:15; 겔 5:13) 하나님은 이름이 ‘질투’일뿐만 아니라, 성품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이시듯, 동시에 ‘질투의 하나님’이다.


3) 하나님은,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모든 것 되기 원한다. 하나님이 유일한 전부가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의 그 마음에 “질투”하고 심판을 내린다고 하였다


하나님이 유일한 모든 것 되지 않는 우상숭배에 하나님은 질투를 발하시며 진노하신다(민 25:11, 신 6:15; 29:20; 32:16; 시 79:5; 겔 8:3, 5; 16:38, 42; 23:25; 35:11; 36:5, 6; 38:19; 나 1:2; 습 1:18; 3:8; 슥 1:14).55)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새번역, 신 5:9)


b. ‘하나님의 열심(성)’으로 번역


1) 하나님의 이루시고자 하시는 열심이 얼마나 간절하신지, 하나님이 그 일을 반드시 성취하신다


“살아 남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오고, 환난을 피한 사람들이 시온 산에서부터 나올 것이다. 나 주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룰 것이다.'”(새번역, 왕하 19:31)


하나님의 질투가 얼마나 크고 간절한지, 하나님은 그것을 반드시 이루시고 성취시키신다(사 26:11; 37:32; 42:13; 슥 8:2). 사실 이것이 우리에게 소망이 된다. 하나님의 질투가 얼마나 큰지 이사야서에 나타나 있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새번역, 사 9:6-7)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이 예언을 주실 때, 이사야는 예언의 성취를 보지 못했다. 하나님이 이 예언을 주시며 반드시 이루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일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이 반드시 이루시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열심’이 이것을 이룬다.


c. 하나님의 질투를 인간의 마음에 품는다


성경에는 ‘카나’의 마음을 품은 수많은 하나님의 질투(열심)가 구약과 신약성경 본문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질투가 왜 중요한가하면, 그러한 하나님의 질투(열심, 열성, 열정)를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그 질투를 가지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역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이르되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하고, 이에 자기 병거에 태우고” (왕하 10:16)


예후가 아합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죽이고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죽인다. 이러한 행동의 동기는 하나님의 질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시 69:9)


다윗은 주님을 사모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고 그분과의 임재 가운데 있는 열심(키난)을 가지고 있었다.56)


“내 대적들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정이 나를 삼켰나이다.” (시 119:139)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자들을 자신의 대적으로 삼을 정도로 그것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심을 가졌다.57)

신약에서는 구약의 히브리 사상의 질투 개념을 담는 단어로, 젤로오(zhlovw)를 사용하였다. 이 단어는 ‘불타오르는 마음을 가지라.’, ‘진심으로 바라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58) 앞 뒤 본문의 문맥에서 구약의 ‘카나’의 의미를 담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zhlovw)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새번역, 고후11:2)


바울은 하나님의 질투(열심)가 그 속에 있었다. 그 질투의 마음을 가지고 사역을 하였다. 신앙에 있어서 실제적인 하나님의 질투를 인간이 품는 다는 의미는, 한 마디로 하나님 아버지의 애타는 마음을 인간이 동일하게 가지는 것이다. 인간이 아버지 마음의 극히 일부분을 경험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게 되고,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열망의 일부분을 가슴에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질투를 가졌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가슴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zhlovw)을 내라 회개하라” (계 3:19)59)


요한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신앙의 회복하는 것 중에 하나로 ‘하나님의 질투’를 가지라고 말하였다.

 

성경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열심과 열정이 등장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열정을 가지는 것은 위대한 하나님의 일들을 이룩한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이루시고자 하시는 그분의 뜻과 의중을 그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해주신다. 사역의 원동력은 이것에서 나온다. 지치지 않고 실망하지 않는 원동력이 흔히 비전이라 말한다. 그런데 세상적인 비전의 원리와 다르게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이 비전의 원동력이라 말한다. 리더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열정이다. 이 열정이 바로 하나님의 질투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질투(열심)’를 경험하였다. 지금도 그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면 눈물이 핑 돌고, 가슴에서 불이 일어나는 것 같다. 하나님이 반드시 세우시고자 하시는 열망이 내 속에 있기 때문이다.

 

선교지에서 나 자신이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에 태어난 것이 후회스럽고, 쥐나 바퀴벌레보다 못한 나 자신을 보면서 한없이 죽어지는 경험을 하고 있을 때였다. 드러나는 행동은 누구보다도 경건하며 죄 없고 바르게 보였지만, 나의 마음 속에 깊이 숨어있는 죄를 보게 되었을 때, 심지어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라기보다 나의 처지가 너무나 죄악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지금 내가 지옥에 있고 더 깊은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사건의 본문이었다. 더 이상 의자에 앉아 있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도저히 말씀의 무게 앞에서, 의자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내가 성경 속에 출애굽기 32장에 말씀하신 모든 상황을 경험하고 있고 또한 그 충격 때문에 몸서리 치고 있었다. 시내 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백성의 모습을 나도 동일하게 보고서는 모세가 받은 충격을 나도 동일하게 가졌다. 또한 모세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출 33:26)하였을 때, 레위인들이 나아왔다. 레위인들에게 칼을 쥐어주고 진의 문에서 다른 문까지 가면서 눈에 띄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는데 그냘 죽인 사람이 삼천 명이었다. 나는 그 시대의 레위인이 되어서 나의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죽이고, 모세 앞에서 서서 하나님의 진노 앞에 내가 한 일 때문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모세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하며 처절한 기도를 하였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다가 나중에는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다음날 무섭고 두려워서 성경을 읽지 못하였다. 이틀 뒤 출애굽기 33장과 34장을 읽었다. 다시 의자에 앉아 있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 않았다. 또 성경 속에 출애굽기 33장과 34장의 말씀의 상황을 경험하고, 내가 몸서리 쳤다. 내가 모세가 되어 모세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진노가 풀리지 않아 낙심하고 죽을 것 같은 좌절을 경험하였다. 하나님이 함께 가지 않겠다는 말은 나에게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었고, 회막을 세우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가 백성으로부터 떠나 있는 것 때문에 나는 괴로워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성서의 모세시대를 너무나 선명하게 현장에 서서 하나님 아버지의 질투의 마음이 나의 뼛속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다른 신에게 절을 하여서는 안 된다. 나 주는 '질투'라는 이름을 가진,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새번역, 출 34:14)


하나님이 이 시대에 신앙의 본질을 세우시고자 원하시는 그 마음이, 강렬하게 나의 가슴에 다가왔다. 하나님만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을 얼마나 하나님이 원하시는지, 사무치는 원한같이 나의 가슴에 박혀버렸다.

 

나는 나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질투라고 생각했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신학대학 시절 목요찬양을 인도하면서 예배를 회복시키시기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가득하였다. 또 열방이 주님께 돌아오길 원하시는 세계 선교의 비전의 가슴이 가득하였다. 나는 그러한 것이 하나님의 질투라 생각했는데, 이번 경우는 깊이와 강도와 차원 자체가 달랐다.

 

나의 그 모든 것을 다 주어서라도 주님이 나의 인생의 유일한 모든 것이 된다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수년이 흘러갔지만, 이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부풀고, 이것을 설교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나눌 때면 나의 목소리는 항상 떨리고 두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사무치는 원한처럼 나의 속에 자리 잡혀 있다.

 

사람마다 하나님이 다양하게 다루시지만 하나님은 나를 독특하게 다루셨다. 이렇게 성경 시대를 너무나 선명하게 직접 경험한 것과 같은 체험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마지막이었다. 나는 선명한 하나님의 질투가 내 속에 있다.


4. 비전


a. 비전은 하나님이 계획을 세우시고, 인간을 초청하신다


비전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을 가지고 세우신 계획이다. 그 뜻과 의중을 그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주신다. 그리고 그 사람을 통해 그것을 이루신다. 그러므로 비전은 우리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세우시고 인간을 초청하신다. 이것이 비전이다.

 

노아 시대에 주님이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은, 죄로 가득한 세상을 멸하시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한 가족을 통해 믿음의 유업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그 뜻과 의중을 이루시기 위하여 한 사람을 선택하시는데, 그 사람은 노아였다. 노아는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알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120년 동안 산 위에 방주를 만들고 기다렸다. 누가 먼저 이 비전을 세우셨느냐 하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가지신 뜻과 의중을 안 노아는, 자신의 인생에 하나님의 뜻과 의중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의 비전으로 삼았고, 자신의 삶을 조정하였다.

 

아브라함 시대의 하나님의 뜻과 의중은, 믿음의 조상을 만드는 것이 주님의 뜻과 의중이었다. 그분은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택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알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는 비전을 소유하였고, 자신의 삶을 조정하였다(창 12:1-3).

 

모세 시대에 주님이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왕으로 삼는, 자신의 백성 만드시는 것이었다. 그분은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모세를 택하였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주님께로 인도하고(출 19:4), 그 부산물로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되시는 것이 그의 비전이었다.

 

다윗 시대에 주님이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은, 이스라엘에 주님 마음에 합당한 왕을 세우고, 그의 후손을 통해 메시야를 약속하시는 것이었다. 그 분은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다윗을 선택하였다. 다윗은 하나님 그분이 인생의 모든 것이 되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이 그의 비전이었고, 자신의 삶을 조정하였다.

 

예수님 시대에 주님이 가지시고 계신 뜻과 의중은,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고, 선포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었다. 그 분은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가지셨던 비전은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목이었다.

 

성경은 누구 하나 하나님을 위해 자기가 이루고 싶은 것을 비전 삼은 사람이 없었다. 누구 하나 자기가 하나님께 이루어 드리고 싶은 것을 비전 삼은 사람도 없었다. 누구 하나 자기의 재능을 감안하여 그것에 맞추어서 비전을 삼은 사람이 없었다. 누구 하나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의 맞추어진 계획을 가지고 나가 그것을 이룬 사람이 없었다. 누구하나 자기 처지를 생각하여 분수에 맞게 자기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비전을 삼은 사람도 없었다.

 

모든 주도권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다. 그분이 주권자이시다. 계획도 그분이 세우시고, 어떻게 그 비전을 이루어 갈지도 주님이 세우신다. 인간이 가질 수 없는,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거대한 비전을 세우시고 인간에게 초청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 그 일을 이루시는 것을 기뻐하신다. 이것이 비전이다.

 

히브리어는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을, 시제를 과거로 표현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미래에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시간으로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 그 시점에 이미 이룬 것으로 간주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과거형으로 사용한다. 요엘 1장에 보면, 하나님이 내 땅에 올라온 한 이족을 메뚜기로 표현하였는데 모두 과거형이다. 그런데 이 일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었다. 이러한 용법은 다윗 시대부터 초대교회 시대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60) 이렇게 히브리인은 하나님의 비전을,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그들의 언어, 문법을 거스르는 용법을 사용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말씀 하신 그 때가, 사건이 일어난 과거가 된다. 이것은 히브리어의 습관이기 보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는 미래에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 성취되기 때문에, 미래의 일을 항상 과거형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b. 거짓 비전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성경의 원리를 따르자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가지고 계신 비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이 시대에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주님을 위해 무언가 주님이 기뻐하실만한 비전을 세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비전이 성경적으로 입증하기 위하여, 성경의 옳은 말씀들을 모두 끌어들여, 그 비전을 합리화시킨다.

 

구약성경에 엘리 제사장이 나온다. 그는 외세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는 사사이며 제사장이었다. 그는 그 시대에 하나님이 가지신 뜻과 의중을 전혀 몰랐다. 성경을 탁월하게 잘 알았기 때문에, 전쟁에서 전승한 언약궤가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통할 것을 확신하였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는 모든 성경 구절을 동원하여 성경적인 설교를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터에 언약궤를 내어오자, 이스라엘 진이 진동할 정도로 사가가 충천하였다. 얼마나 큰 함성을 질렀던지 땅이 울릴 정도였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언약궤 앞에서 요단 강물이 서고,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과 같은 성경의 역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기대와 반대로, 더 많은 이스라엘 전사들이 죽고, 언약궤마저 빼앗겼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시기에,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이 적군을 향해 싸우셔야 했다. 모든 성경은 엘리 제사장의 편으로 보였을 것이다. 또 성서적으로 그래야 했다. 무엇이 문제였는가? 엘리 제사장은 그 시대에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몰랐다. 대신 사무엘은 알고 있었고, 엘리 제사장은 그것을 무시 하였다.

 

이와 같이 거짓 비전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계획을 세우고 그것이 성경적인 것이라는 모든 성경 구절로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다. 자신의 비전을 하나님의 비전으로 둔갑시키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기도 하다.


c.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이루기 위해,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있다. 그러나 막연하게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없다


누구든지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다. 그래서 신앙도 하나님 중심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이든 무의적이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늘 자신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보는 것이 아주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사람을 위해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펼치시지 않는다(신앙의 본질로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개개인에게 있지만).

 

「하나님의 경험하는 삶」 책 속에는 다음과 같이 이것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고자 할 때 이런 질문을 한다.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 나의 신학교 교수시던 게인스 도빈스 박사님은 “잘못된 질문을 하면 잘못된 답을 얻는다.”라고 말하곤 했다. 우리는 종종 모든 질문은 타당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답을 찾으려는 데 항상 틀린 답만 나올 때 우리는 뭐가 잘못되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답을 찾기 전에 당신이 과연 올바른 질문을 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기 바란다.61)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라고 하는 것은 올바른 질문이 아니다. 바른 질문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이다.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먼저 알고, 그 하나님의 뜻과 의중에 나의 인생을 맞추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지금 내가 처한 곳에서 하나님이 목적하고 계신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일단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 알게 되면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초점이 ‘내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 맞춰져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가지신 뜻과 의중을 사람에게 보이시고, 그것을 이루시기 위한 인간을 향한 뜻을 가지고 계시다. 미묘한 차이 같아 보이지만, 절대적으로 중요한 차이이다. 자기 중심적인 신앙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뜻은 항상 자기 중심에서 시작된다. 하나님 중심에서 시작된 신앙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막연하게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구하는 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이루기 위해,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있다.


나에게 비춰진 하나님의 비전에 대한 성서적인 시각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뽑아 버렸다. 이 말씀 앞에 내가 걸어왔던 인생 가운데, 과연 하나님 중심으로 비전을 선포하고 추구하였던 것이 얼마나 되는지 돌아보았다. 나는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분명히 성경에서 모두 가져온 맞는 말이지만, 내가 선포하고 내가 추구하였던 모든 비전 속에는 내 야망이 담겨 있었다. 나는 분명히 성경 속에서 그 비전을 찾아내었고, 주님이 분명히 그것을 기뻐할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분명한 하나님의 비전이 아니었다.

 

나는, 나의 비전인지 하나님의 비전인지 분별하는 나만의 노하우를 발전하였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이 세상을 향한 그분의 비전이 99%이고, 내 마음 속에 아주 깊이 숨어있는 야망이 1%라도 드러나면, 더 이상 하나님 그분의 비전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을 이용하여 이루고자 하는 야망으로 간주하기 시작하였다. 주님을 위해 일하다가, 이 일을 인하여 내가 조금 유명하여지겠지 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내 속의 야망과 주님의 비전이 섞이는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사역이 더 커지면, 더 큰일을 할 수 있고 사람들이 나를 좋게 칭찬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즉시, 내 야망이 주님의 일에 섞여 들어간 것으로 간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내가 하는 모든 사역이 내 야망이었다. 더 이상 사역을 할 수 없었다. 울고 또 울고, 밤을 지새우며 기도해도 내 야망은 없어지지 않았다.

 

기도원을 다녀온 후 모든 목회 자체와 나의 모든 계획을 그만 두었다. 목사 직분도 반납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나의 아내에게, 나는 목회자 자질이 없으며,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염없이 나의 처지를 보며, 죽어지는 경험을 하고 있을 때, 청소년 시절 주님이 육성으로 하신 말씀들이 생각이 났다.

 

자고 있는 나를 세 차례 사무엘처럼 불러서 깨우시고, 육성으로 오늘날까지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시면서, 나를 하나님이 이루실 비전으로 초대하신 일들이 기억이 났다. 그것은 이슬람과 개신교와 캐톨릭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흥에 대한 계획들이었다. 그리고 그 부흥을 방해하는 프리메이슨에 대한 나의 사역 이야기도 있었다. 주님이 그 때 하신 말씀 중에서, 선교사로 나가되, 선교 헌금을 모집하지도 말고, 선교사로 나간다고도 하지 말고, 모든 것을 주님을 의지하여 나아가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나는 공부하던 교육학을 선교학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선교 훈련을 받고 선교사로 나아갔다. 형식적인 파송 교회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감사의 마음이었다. 그 어떤 모금 운동도 하지 않고, 냉장고에 부치는 기도제목도, 기도 제목 책갈피도, 명함에 계좌번호조차도 넣지 않고, 믿음으로 선교지에 나아갔다.

 

우리 가정은 한 번도 끼니를 건넌 적이 없었고, 더도 덜도 아닌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님은 우리를 먹여 살리셨다. 오늘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한 적이 있었는데, 1달 반 동안 우리 가족이 하루에 한국 돈 100원으로, 3명이 보낸 때도 있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가장 큰 불안은, 우리가 굶어 죽어도 선교지에서 아무도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없고, 한국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 고난 가운데, 나에게 이렇게 질문하시는 것 같았다. “이래도 내가 너의 모든 것이냐? 너는 나 때문에 이 상황에서 기뻐할 수 있느냐?”나는 한 시간을 울고 또 울었다. 현지 풍토병으로 온 가족이 쓰러져 있고,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는 상황 가운데, 밥과 계란으로 하루 끼니를 때우는 지금. 그래도 주님이 나의 모든 것인지 나를 돌아보니 예수님이 나의 완전한 주인이 아닌 나는 가짜였다. 그렇게 정직하게 나의 모든 마음의 고백을 드리고 나니, 내 마음에 기쁨의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찬양이 흘러나왔다. “주님이 저의 전부이며 주님이 나의 유일한 기쁨입니다.” 하며 얼마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는지 모른다. 정말 기쁨이 충만하였다. 그리고 자녀와 아내를 위해 기도하였더니, 아침이 되자 풍토병이 다 나아버렸다. 기적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내가 기대하지 않았고,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나의 계좌에 돈이 입금되기 시작하였다. 자기들보다 못사는 외국인이 불쌍해서인지 많은 무슬림들이 우리를 도와주기 시작하였고, 언어를 배우기 위해 정착한 곳에서 외국인으로서 마을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 가족을 주님 자신에게로 인도하셨고, 비전은 이렇게 나의 삶 가운데, 고난을 통해서 먹고 자라고 있다.


5.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는 자세


a.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고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는 것이 사역의 출발점이었다. 직분 때문에 그리고 체면 때문에 또 목사님의 칭찬과 교회 성도들의 칭찬 때문에 사역하는 것이 아니다. 칭찬은 힘을 얻게 하지만, 칭찬은 언제나 아부가 될 수 있고, 야망이 속에서 꿈틀거리게 하고 잘못된 동기의 사역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우리가 주를 위해서 스스로 계획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노력해서 무엇인가 주를 위해 이루는 것이 사역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요 5:17, 19-20)


이 본문을 헨리 블렉가비 목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아버지께서 오늘 일하신다.

2. 나도 일한다.

3.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4. 나는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주시하여 본다.

5. 나는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본 것을 행한다.

6.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셔서 아버지의 행하시는 모든 것을 보이신다.62)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았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 일에 동참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그 일을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서 행하셨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10-11).


나는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사역의 개념을 알고 나서, 나의 삶 속에서의 사역을 돌아보았다. 내나 내린 결론은 나는 목사도 아니었다. 그저 주님을 위해 무언가 수많은 희생과 열심을 가지고 일을 한다고 하였지만, 주님이 시키지 않은 내 나름대로의 주님을 위해 헌신한,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역이 너무나 허무하고 가치 없어 보였다. 내가 지금까지의 사역을 미화하려는 나의 마음이 하나도 없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중도 모르고 그저 희생과 봉사로 섬겼던 모든 것 중에는 하나님께 도움 되었던 수많은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쓸모없는 사역을 하였던 것이 비춰졌다.

 

교회에서 일꾼을 뽑을 때, 성경에서는 딱히 정해준 것이 없다. 어떤 사람은 초대교회는 장로(감독, 혹은 목자)와 집사(안수 받은)만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성경은 더 많은 직책이, 초대 교회들마다 다르게 선출하였다. 개 교회들마다 모두 달랐다. 초대교회 일꾼들은 필요에 의해서 각 교회들이 각기 다른 이름으로 일꾼들을 기도하면서 선출하였다. 각 교회의 직책은 교단마다 다르지만, 필요에 의해 교단의 이상으로 교회가 선택한 것이다.

 

문제는 사역이 필요하여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방법으로 직책을 주면 열심히 하니까 주는 것이 문제이다. 필요 이상으로 장로가 많고 집사가 많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교인이 적어도 8천명 이상이었는데 안수하여 세운 집사가 7명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수많은 교회에서의 문제의 출발점이 구조적으로 이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을 경험을 통해, 그리고 주변의 교회를 통해 볼 수 있다. 직분을 남발하여 예배와 성경 공부와 교회 행사에 의무감으로 참석하게 할 수 있다. 헌금과 봉사를 의무감으로 하게할 수 있고, 힘들이지 않고 성도들을 의무감으로 신앙생활 하도록 올무를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성도들이 만들어 질 수 있을까? 나의 경험으로 극소수의 예외는 있지만, 대부분 절대 성숙하지 않는다. 성경의 원리는 필요에 의해 직분을 만든 것인데, 힘들더라도 성경적 원리대로 해보라. 그것이 훨씬 성도들을 성숙하게 만든다.

 

전도를 교회에서 활성화시키고,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전도대회를 열어 수많은 상품과 상금을 걸고 경쟁을 시켜 전도하게 한다. 그 중에 신실하게 전도하는 사람도 있지만, 온갖 비열한 방법으로 교회 전도 잔치에 참여케 하려는 시도를 교회가 부축이고 있다. 2000년 기독교 역사상 상품 걸고 전도왕 뽑아가는 이벤트를 통해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시도는, 내가 알고 있는 교회사 책들을 모두 보아도 우리 시대밖에 없을 것이다. 정말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출발된 것인가?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목사의 야망에서부터 시작된 것인가?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 보내실 때, 완전히 무일푼으로 보내시며, 일꾼이 저 먹을 것을 현지에서 주님만을 의지하여 찾아 먹고 전도하라 보내셨다. 지금 우리 시대의 전도에 대한 사역 자체가, 완전히 다른 출발점을 가지고 있었다. 목사들은 다른 교회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사례비를 받아 오는데, 자신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말하고 자신이 받을 자기 몸값을 정하는 목사도 있다. 예수님 시대와 초대교회는 그렇게 사역하지 않았다. 필요한 만큼 현지조달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크게 선포되는 것으로 기뻐하였다. 그것이면 충분하였고, 오직 하나님 그분으로 만족하였다. 그렇게 다른 교회 집회 다니면 벌어온 돈으로 자기 교회 건축 헌금하여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 한국은 필요 이상으로 목사들 강사료가 최상급이다. 자신이 세상의 강사들과 동급 이상으로 생각한다. 예수님은 몸값은 얼마였을 것 같은가? 예수님은 강사료는커녕 그저 재워주고 먹여주는 것으로 만족하셨던 분이셨다. 우리 시대 강사료를 다시 헌금하고 오는 목사가 아직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소망이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 보내시면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전적으로 주님께 의지하도록 가르치셨다. 수많은 열매들이 맺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하늘에 이름이 쓰여 있는 것으로 기뻐하라시며 책망하셨다. 주님은 고귀한 전도의 동기를 가르치셨다.

 

교회에서는 일정한 목표를 정해놓고 목표 달성을 위해 죽어라고 뛰어서 그 목표를 달성하는 사회의 경영기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많은 일반 성도들은 그것을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중 대형교회는 반드시 참석인원에 대한 달성 목표가 있어서, 그 목표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전화도 하고 문자도 보내는 등등의 일을 하고 있다. 이러한 사역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동기가 문제이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사역하지 않고, 자신이 주님께 해 드리고 싶은 일을, 하나님의 동이 없이, 자신이 성경 속에 마음에 와 닫는 적합한 성경구절로 합리화하여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것은 개인의 야망이다. 아무리 수많은 희생과 충성과 봉사를 하였더라도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이 가지신 뜻과 의중,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의 동기를 보시기 때문이다.


b. 자신의 인생을 조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이 선명하게 자신에게 비춰져 왔다. 그러면 자신의 삶을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이 선명하게 비춰주신 이유가 초청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의중이 비춰지면, 자신을 조정하지 않고 안주하려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변화된 삶을 살려면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

 

누가복음 18장에 부자청년은 영생에 대하여 주님께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러나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눅 18:22)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이 부자 청년은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는 부자였기 때문에 믿음의 갈등을 하였다. 결국 그는 슬그머니 그냥 돌아갔다. 그는 분명히 영생을 얻기를 원하기는 했지만 예수님에게로 자신의 인생을 조정하는 일은 실패한 것이다.

 

어느 날 엘리사는 밭에서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그 길을 지나가던 엘리야 선지자가 그에게 겉옷을 던지며, 자기를 따르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일, 예언사역에 동참하도록 그를 부른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엘리사는 그때, 과감하게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로 조정하였다.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작정으로 자신의 농기구를 불살랐고, 한 겨릿소를 잡아 요리해 온 동네사람을 먹였다. 그가 그렇게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로 조정하고, 엘리야를 따랐는데, 그 결과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해 구약에 기록된 것 중 가장 위대한 기사와 이적을 행하게 하셨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가 있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면 우리의 삶을 조정해야 한다.


c. 자신의 삶을 조정하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은 “나를 떠났다”, “부정하다”또는 “더러워졌다”고 취급하신다


자신의 삶을 조정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있고, 조정하지 않고 안주하여 있으면 하나님이 “나를 떠났다.”, “부정하다”또는 “더러워졌다”고 말씀하신다. 학개에게 하나님이 임하셨다. 성전을 짓는 것이 그 시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모든 백성이 그것을 알고 있었고, 제사장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이 지금 이 시대에 하시고자 하시는 그 일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이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제사장에게 가서 이렇게 전하라 하셨다.


“학개가 또 다시 시체에 닿아서 더러워진 사람이, 이 모든 것 가운데서 어느 것에라도 닿으면, 그것이 더러워지는지를 물어 보니, 제사장들이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학개가 외쳤다. "이 백성은 정말 더러워졌다. 이 민족은 내 앞에서 정말 그렇다. 나 주의 말이다. 그들이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이 그렇고, 그들이 제단에 바치는 것도 모두 더러워졌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최근에 일어난 일들을 돌이켜 보아라. 주의 성전을 아직 짓지 않았을 때에, 너희 형편이 어떠하였느냐? 스무 섬이 나는 밭에서는 겨우 열 섬밖에 못 거두었고, 쉰 동이가 나는 포도주 틀에서는 겨우 스무 동이밖에 얻지 못하였다.”(학 2:13 ~ 16)


그 시대에 하나님이 무엇을 계획하셨고, 무엇을 이룩하실 것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동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이루시고자 하시는 그 일에 자신의 인생을 조정하여 기꺼이 그 일을 이룩하는 것이 자신의 소망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전이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지금이 너희만 잘 꾸민 집에 살고 있을 때란 말이냐?”라고 질책하신다.

 

많은 경우 학개서는 교회 건물을 짓는데 활용된 건축헌금 본문으로 이용되었다. 본문을 잘 살펴보면 그 중심에 흐르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성전 건축이 아니라, 그 시대에 이룩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라는 메시지이다. 정말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되시고, 목적이고 목표라면, 어떻게 지금 그분이 가지고 계신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자신의 인생을 조정하지 않을 수 있는가?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조정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 그분이 자신의 모든 것이 될 수 있는가? 자신이 당할 대가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조정하지 않을 수 있는가? 주기도문을 아무리 외우고 기도하더라도,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주기도문을 기도할 자격조차 없다. 그러한 상태에 있는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은 ‘부정하다’ 또는 ‘더러워졌다’, ‘나를 떠났다’고 하였다.


E. 신앙의 본질을 지칭하는 단어 - 하나님의 ‘길’


성경에 신앙의 본질을 나타내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길(히브리어로 데리크(&r,D,), 헬라어로 호도스(oJdov"))’이다. 그런데 나는 이 길에 대하여 연구한 논문이나 책을 접해본 적이 없다. 적어도 한국 기독교는 관심을 가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신앙의 본질을 ‘길’로 구약과 신약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라도에 ‘거시기’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참으로 많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지닌 단어가 성경에 ‘길’이라는 단어이다.


1. 길의 중요성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이 세 가지 단어와 관련된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바로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뜻과 의중에 대한 자기 계시의 책’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 자신이 어떤 분인지 자신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많이 반복된 중요한 단어가 ‘길’이다.63)

 

초대교회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것은 안디옥 교회에서 비꼬며 비난하는 의미로 그렇게 불린 예수쟁이라는 별명이다. 초대교회는 내적으로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공동체이었기 때문에, 지역의 교회들마다 다른 자신들의 정체성의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을 '유대인 (Jews)', '그 길 (도)을 좇는 자들 (The Followers of the Way)', '형제들 (brethren)', '제자들 (Disciples)', '신실한 자들 (the Faithful)', '택함을 받은 자들 (Elect)', '성도들 (Saints)', 신자들 (Believers)', 그리고 '하나님의 가정 (the household of God)'이라고 지칭하였지만, 불신자들은 '나사렛 사람들 (Nazarenes)', '갈릴리 사람들 (Galileans)', 혹은 '예수쟁이 (Jessacans,)'라고 불렀다. 여기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을 ‘ 도 (길)를 좇는 자’라고 지칭한 구절이 많이 있다. 그리고 “도 (길)를 전했다, 예수님이 도(길)를 말씀하셨다”라고 까지 표현하였다. 한국말에는 정확하게 번역할 단어가 존재하지 않아서 ‘길’로 번역하기도 하고 ‘도’로 번역 하였다.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에 대해서 히브리 기자는 말하고 있다.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 도다 하였고” (히3:9-10)


이것은 구약과 신약 모두 계속 되는 하나님의 지적이다. 잃어버린 길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회복의 길이 필요하다. 우리 마음대로 회복의 길로 갈 수 없다. 하나님이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셔야 한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출 33:13)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는 백성에게 회복의 길을 하나님께 구하였다.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을 구한 것이다. 신앙의 본질로의 회복의 방법을 구한 것이다.  2000년 기독교 역사 동안 하나님은 부흥을 통하여 이러한 회복의 길을 늘 인도하셨다. 이 시대가 바로 이러한 회복의 길이 필요한 시대이다. 잃어버린 길 즉, 잃어버린 신앙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는 회복의 길을 알아야 한다.


2. 길을 연구하는데 있어서의 한계


성경에 나와 있는 길의 의미는 한 가지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나 주가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일렀다. 가던 을 멈추어서 살펴보고, 옛길이 어딘지, 가장 좋은 길이 어딘지 물어 보고, 그 길로 가라고 하였다.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평안히 쉴 곳을 찾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너희는 여전히 그 길로는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새번역, 렘 6:16)


여기서 말하는 첫 번째 길의 의미는 거짓 신앙,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삶을 의미한다. 두 번째 옛길과 가장 좋은 길 그 길의 의미는 회복, 구약의 신앙의 본질, 인격체이신 하나님 자신, 하나님의 기준, 그 시대에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뜻과 의중, 그때그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인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길”에 대한 의미는 한가지만을 의지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본문의 문맥을 통해 가장 근접한 의미를 정리한 것이다. 더 많은 의미가 나올 수 있다.

길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또 하나의 한계는 원어를 가지고 모두 연구하지 못하고, 새번역 성경에 나온 ‘길’과 ‘도’를 가지고 연구하였다.


3. 일반적인 길의 의미


a. 길 - 일반적인 도로를 말한다.64)

b. 길 - 인생의 여정65)

c. 길 - 방법66)

d. 길 - 자신의 생활과 사업과 신앙과 하려고 하는 모든 일67)


 4. 특별한 지칭의 길의 의미


a. 길 - 죽음 이후의 세계68)

b. 길 - 시온 (=거룩한 길)69)

c. 길 - 구원70)

d. 길 - 새로운 일71)

e. 길 - 회복72)

f. 길 - 창조의 원리73)

g. 길 - 배신74)

h. 길 -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는 궁지75)

i. 길 - 선택76)

j. 길 - 과거의 회상과 추억77)


5. 영적인 목적의 길의 의미


‘길’은 많은 뜻이 있지만, 성경에서 가장 많은 의미를 가진 것이 영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신앙의 본질과 관련된 것이다. 모두 신앙의 본질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a. 길 - 거짓 신앙78)

b. 길 - 하나님 없이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삶 혹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삶79)

c. 길 - 하나님의 심판80)

d. 길 - 하나님의 기준 즉, 하나님의 다림줄81)

e. 길 - 하나님이 하실 일을 미리 준비하는 사역82)

f. 길 - 하나님이 그때그때마다 최선의 방법으로 이끄시는 것 혹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속해 있는 것83)

g. 길 - 하나님의 다루심 = 하나님 자신에게 이르도록 신앙이 성숙하고 성장하도록 인도하시는 여정84)

h. 길 - 하나님이 힘이 되어 주시겠다.85)

i. 길 - 인간과 다른 차원의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해86)

j. 길 - 하나님 자신87)

k. 길 - 구약성경에서의 신앙의 본질88)

l. 길 - 하나님 나라89)

m. 길 - 십자가90)

n. 길 - 복음  (=예수 그리스도)91)

o. 길 - 그 시대에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뜻과 의중92)

p. 길 - 회복93)


6. 길을 다시 찾는 길 - 영적 회복의 길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출 33:13)


모세는 백성의 죄악의 결과 진노하시는 하나님께, 영적인 회복의 길을 구하였다. 진노 앞에 놓여 있는 백성을,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책에 쓰여 있는 자신의 이름까지 희생해가며, 백성을 회복의 길로 인도하고 싶었다. 하나님은 모세가 이러한 열망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기 전부터 회복의 길을 인도하고 계셨다. 그 길은 하나님의 기준을 세우시고, 회개케 하시고,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임재를 부으시고, 한 사람 즉 남은 자를 통하여 일하시며, 하나님의 질투를 보이신다. 이러한 과정이 바로 회복의 길이며 부흥의 길이다.


a. 하나님의 기준을 세우심


하나님은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를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나 하나님 자신에게 백성을 인도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기준을 말씀하신다.


“모세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 가니, 주님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너는 야곱 가문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일러주어라.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 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출 19:3,4)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서 요구하시는 신앙의 핵심은, 자신의 백성을 자기에게로 인도하시는 것이었다. 주님에게로 인도한다는 뜻은, 인격적이고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뜻하는 것이다. 친한 친구를 만나듯, 또한 잉꼬부부가 서로를 알 듯, 하나님은 그 이상의 만남의 교제를 원한다. 하나님이 간절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신 것은 ‘친밀한 교제’이다. 가나안과 수많은 약속들을 하신 것은 그것에 대한 부산물 이었다. 하나님은 목적은 백성과 직접적인 친밀한 관계가 목적이셨다. 그리고 백성 가운데 임재해 계셨다.

하나님은 이러한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한 방법으로 율법과 지켜야 할 도리를 말씀하신다. 무조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고 나아간다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이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출애굽기 20장 에서 23장까지 하나님은 십계명과 법들을 명하시고 24장에서 언약서를 가져다가 낭독하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이 바로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고 하나님 그분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주님이 가지신 선명한 하나님의 가치관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우리의 가치관이 얼마나 소용없고 무익한지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 중심의 시각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b. 회개


하나님과의 언약 후 백성은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행동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출 32:4). 이스라엘 백성이 만든 금송아지는 여호와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은 이것을 우상이라 하였다. 이것은 중요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배교를 하거나 잡신을 믿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신들의 옛 전통과 습관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는데, 그것이 우상이 된 것이다.

 

그 당시 백성의 사고 방식 가운데는 하나님께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금을 부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그 앞에 기쁨을 감출 수 없는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만족해 했다. 하나님은 분명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모든 방법을 명령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마음에,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

 

그 당시 백성의 사고 방식 가운데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친밀한 교제를 나누어야 되는데,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이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복신앙이 판을 치고, 율법주의와 인본주의가 진리인양 둔갑하는 시대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좀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가장 정성을 드려 귀한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서 눈에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송아지를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표증으로 삼았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신 것이 이것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출 32:7-10)


인격적인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것이 대체한 모든 것을 하나님은 우상이라 말씀하신다. 그들이 다른 신을 섬긴 것도 아닌데,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지, 백성을 진멸하고 모세 한 사람을 통해 큰 나라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모든 백성을 죽이겠다는 말씀이다. 얼마나 놀라고 무서운 말씀인가? 백성이 배교하여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이 바로 하나님을 버린 것으로 간주하신다. 모세는 하나님의 화를 주의 백성에게 내리지 말아 달라며 하나님께 울부짖는다. 그리고 백성이 있는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지 백성에게 보여준다.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 32:26-29)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는 백성이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얼굴을 자신의 백성에게 돌리시고 사하실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이튿날이 되자 모세는 그것으로도 부족한 것을 알았다. 하나님의 진노의 수위가 얼마나 큰지 모세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기도한다.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 (출 32: 31-35)


모세는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 쓰여 있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께 백성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자신의 지금과 내세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싶었다. 그만큼 하나님은 진노를 감당할 수 없었다. 모세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용서와 자비를 구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차선의 방법을 제시하신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출 33:1-3)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신 가나안을 주시기로 하신다. 백성보다 먼저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모든 준비를 하겠다고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임재가 백성에게서 떠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부산물로 가나안은 주겠지만, 하나님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시고 중요하게 여기시는 자신의 백성과의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백성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친밀한 교제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임재하여 백성 가운데 계셨다가는 하나님이 어느 순간 분노하여 자신들의 백성을 모두 죽일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 말씀을 들은 백성은 죽은 것보다 못한 영적인 죽음을 맛본다. 이 말씀 속에는 섬뜩함과 무서움이 포함되어 있다. 더 이상 죄인 된 자신의 백성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죽음보다 더 큰 절망이고, 바로 지금, 지옥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한다. 회개는 바로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고개를 돌리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는 자신을 보는 것이다.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출 33:4)


하나님은 백성의 장신구를 달지 못하도록 명하신다. 또 다시 이러한 우상에 빠질만한 근원을 없애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심각한 것이, 이 세상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신 것처럼, 성경의 모든 약속을 다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유일한 목적이고 목표가 되어 친밀한 관계를 가지지 않는 너희들을, 약속한 것을 다 주기만 할뿐, 나는 너희에게 임재하지도 않고 교제하지도 않고 함께 하지도 않겠다고 하신다.

 

모세는 인격체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 그 분이 자신의 모든 것 되었다. 자신에게 부귀영화와 사람들의 인정, 명예가 주어지지 않아도, 하나님 그분 한분을 잃어버리는 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큰 슬픔이었다. 백성의 슬픔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모든 장신구를 떼어내어 버린다.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모든 부귀영화와 면류관과 자랑들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보다도 더 가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되었다.

 

회개는 인격체이신 하나님의 진노를 보는 것이 회개이다. 하나님의 분노에 자신이 몸서리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시고 계신 것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그분만이 유일한 나의 소망이기에 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중요하게 여기시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이다.


c.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이스라엘 백성이 심각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몸서리 치고 있다. 백성은 자신들이 보아도 이것이 이렇게 나쁘거든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어떠한지 인식하고 괴로워하였다. 그들이 죄를 범한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심각한 죄인지 인식하고 깨닫고 그것을 미워했으며 혐오했으며, 철저하게 자신들을 정죄하였다.

 

그래도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임하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졌기에 하나님이 더 이상 백성과 함께 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곳을 찾는데, 그곳은 이스라엘 백성이 없는 진 밖이었다.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 33:7-11)


죄 아래 놓여있는 진 중에서는, 하나님이 모세까지 외면하셨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모세조차도 하나님은 임재해주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더 이상 이스라엘 진 중에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자, 모세는 이스라엘 진 밖에 회막(성막이 아니다)을 세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구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진 밖에 있는 회막에 임재하신 것을 백성이 목격한다. 진 밖 회막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추구하자 하나님이 친구와 이야기하듯 모세와 그 친밀함을 회복하신다.

 

백성도 자신들이 거주하는 곳에 더 이상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서 아무리 예배하고 찬양하고 주님을 섬겨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몰려들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항상 이러한 일을 하셨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는 교회와 도시를 떠나라 하셨다. 부흥이 시작하시기 전에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사람들에게는 항상 그렇게 하나님이 인도하셨다. 루터와 칼빈이 그랬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랬고, 영국 웨일즈의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항상 하나님은 그렇게 구별되게 하나님이 사용하실 사람들을 산으로 혹은 한적한 곳으로 인도하셨다. 더 이상 기독교의 중심에는 임재가 없기에 따로 그들 가운데 임재하셨다. 그렇게 부흥은 항상 변방에서 시작되었다.

 

모세는 이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 사건은 백성의 영적 회복의 깃털이라는 것을 인식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한다.


“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출 33:15 ~ 18)


더 큰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자신의 성품과 속성들을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인간에게 보여주시기를 구한다. 하나님이 그것도 들어주신다.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18-23)


하나님이 자신의 인격과 성품과 속성들을 인간에게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보여주신다. 성경을 묵상하고, 삶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과 같이 다양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인간에게 자신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라는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영적 회복이 일어나는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항상 하나님은 자신이 사용하실 사람들에게 이렇게 영광의 임재를 통해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다. 마틴 루터, 존 칼빈, 조나단 에드워드, 에반 로버츠, 죤 웨슬리, 데이비드 몰간, 하웰 해리슨, 다니엘 로렌드, 존 리빙스턴, 그리고 한국의 길선주 장로 등등……. 부흥은 항상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부흥 때마다 이러한 영광의 임재는 교회와 도시와 나라에 부어졌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는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이끌려서 교회로 몰려들게 만들었다.

 

천국을 미리 맞보는 이 가장 영광스러운 영광의 임재를 경험한 조나단 에드워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1737년 어느 날, 내 건강을 위해서 숲 속으로 말을 타고 달려가다가 말에서 내려 늘 하던 대로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걸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정말 특이하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놀랍고 위대하며 충만하고 순결하며 달콤한 은혜와 사랑, 온유하고 겸손한 낮아지심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 그처럼 고요하고 달콤하게 나타났던 이 은혜는 하늘보다 크게 보였다. 그리스도의 인격이 말로 다할 수 없이 탁월하여 모든 생각과 관념을 다 삼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탁월하게 보였는데, 내가 판단하기로는 거의 한 시간 가량 그러한 일이 계속 되었다. 그래서 그 시간 내내 거의 대부분을 나는 눈물의 홍수에 빠져 큰 소리로 울었다. 나는 나 자신이 텅 빈 채로 쓰러져, 먼지 속에 누워 오직 그리스도로만 충만해지고, 거룩하고 순전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싶은 강한 영혼의 열망을 느꼈다. 나는 그것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를 신뢰하고 바라보며, 섬기고 따르며, 완전히 성화되고, 하늘에 속한 거룩한 순결함으로 깨끗해지기를 갈망하게 되었다. 나는 다른 때도 여러 번 그러한 광경을 보았고, 그럴 때마다 그것은 똑같은 효과를 발하였다.

때로는 한 단어만 언급해도 내 마음이 뜨거워진다. 또는 그리스도의 이름이나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이름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내게 영광스럽게 나타나셨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높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내가 체험한 것 중에서 가장 큰 기쁨과 즐거움은, 나 자신의 성공과 유익에 대한 소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복음의 영광스러운 것들을 직접 보는 데서 우러나온 것이다. 이러한 달콤함을 누릴 때 그것은 마치 나 자신의 성공에 대한 생각보다 훨씬 더 높은 위치고 나를 끌어올리는 것 같았다. 때로는 내가 나의 밖에서 보는 그 영광스럽고 즐거운 대상에서 눈을 떼어, 나 자신과 나 자신의 유익에 관심을 갖는 것이 정말 큰 손해처럼 여겨져 참을 수가 없다”94)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는 다르다. 많은 책과 논문들이 혼돈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성서는 분명히 다르게 말하였다. 하나님은 영적인 회복을 위해 두 가지를 회복하시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하시고, 둘째는 영광의 임재를 주님의 주권으로 부어주신다.


d. 신앙의 시험을 하신다. (하나님의 특별한 다루심)



(곧 보완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남은자)


이러한 모든 일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도록 하셨다. 역사 가운데 길을 잃은 수많은 시대에 하나님은 한 사람을 시작으로 혹은 남은 자95)를 시작으로 자신의 백성의 회복을 시작하였다.

 

모세는 이제 하나님께 모든 약속을 받았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함께 가시겠다는 확답을 듣는다. 하나님이 모세를 신뢰하고 그를 기뻐하신다. 모세의 이름으로도 모세가 어떠한 사람인줄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그러나 모세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백성을 위해 간구하는데, 하나님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모세 때문에, 백성의 영적인 회복을 승낙하신다.


“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출 33:13-17)


하나님은 모세의 이름만으로도 모세를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하나님은 모세의 중심을 모세가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많이 알고 계셨다. 그래서 모세를 기뻐하셨던 하나님이, 모세의 요청에 모두 승낙하신다.

 

부흥은 이렇게 시작한다.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한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진노를 그치고 회복을 시작하신다. 종교개혁시대에 가장 볼품없고 권력조차도 없고 연약하였던 마틴 루터를 통해, 부흥이 시작되었다. 그 부흥의 열매가 종교개혁이 되었다. 시골 한적한 곳에서 몸이 약하여 오래 걷지 못했던 병약한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 한 사람을 통해, 미국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시골마을에서 하나님은 부흥을 시작하셨고, 미국 전체를 뒤흔드는 부흥으로 인도하였다. 용서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한 사람 모세를 통해 하나님은 회복으로 바꾸셨다. 1907년 1월 6일 주일 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 장로 한 사람의 회개와 간구를 통해 하나님은 평양의 영적 회복을 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회복하시기 위해, 항상 남은 자를 남기신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특별히 자신을 위해 남겨놓은 사람이다. 그를 하나님은 다루시고 자신의 마음에 합하도록 다듬으시고, 자신에게로 이끈 사람이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은 회복하신다.


f. 하나님의 질투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돌리신 고개를 돌리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모세는 두 번째 돌판을 가지고 산꼭대기에 가져간다. 그리고 하나님은 백성과 다시 언약을 세우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 (출 34:10-11)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 앞에 백성과 다시 언약을 세우신다.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것들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나아가야 하는지 이르신다.

 

그런데 가나안을 이야기하시면서 가나안 사람 모두를 ?아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제단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어 버리라.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출 34:13,14) 하셨다.

 

구약성서 당시의 종교는 자신의 경제와 물질과 야망이 연결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이러한 말씀을 하시면서 “ 여화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하는 하나님임이니라”(출 34:14) 하셨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하면, 그러한 하나님의 질투(열심)를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그 질투를 가지라는 것이다. 인격적인 하나님 그분을 대체하는 모든 것을 우상으로 정의하고, 대체하는 모든 가짜신앙과 불신앙을 제거하고, 하나님 그분과의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가, 자신의 유일한 삶의 목적과 목적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흥을 시작하실 때 이러한 질투를 가진 사람들과 기도를 통하여 부흥을 시작하였다.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의 열정이 부어지고, 하나님의 열심히 부어지면,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께 밤낮 없이 부르짖는 기도를 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땅에서 회복을 원하는 길이다.


이러한 영적회복의 길은 내가 모두 경험한 것이다. 나는 주님의 기준을 처음 보고, 정신없이 주님이 이끄시는 신앙으로 회복되어져 갔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하나님이 나를 영적회복의 길로 이끄신 것을 기억하며 순서대로 배열하였다. 그리고 성경 출애굽기를 읽으니, 모두 성경에서 하나님이 영적인 회복을 일으키셨던 순서 그대로 모두 이루어진 일이었다. 나는 이러한 영적 회복이 이슬람과 개신교와 캐톨릭에서 일어날 것을 알고 있다.



1) 이 주제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 참조. R. Smend, Die Mitte des AT, (Zurich, 1970), 7, pp. 27-33.

2) 게하르드 하젤, 구약신학: 「현대 논쟁의 기본 이슈들」 김정우 옮김, (서울: 엠마오, 1994), pp. 169-206.

3) W. Eichrodt,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2vole; Philadelphia, 1961, 1967), p. 13.

4) E. Selin, Theologie des AT (2nd ed. ; Leipzig, 1936), p. 19.

5) A. S. Todd, Old Testament Theology,  (Philadelphia, 1957), p. 30.

6) Wildberger H, “auf dem Wege zu einer biblischen Theologie,” Evt, 19 (1959), p. 77.

7) Seebass H, “Der Beitrage des AT zum Entwurf einer biblischen Thelolgie,” Wud, 8 (1965), p. 34-42.

8) Klein G, “‘Reich Gottes’ als biblischer Zentralbegriff,” Evt, 30 (1970), pp. 642-670.

9) Thelolgische Zeitschrift, 24 (1968), p. 163.

10) Evanglishe Theologie, 30 (1970), p. 295.

11) Die Mitte des AT, 49, p. 55

12) G. von Rad, Theologie des Alten Testaments (5th ed; Munich, 1966), p. 128.

13) S. Hermann, “Die Konstruktuve Restauration, Das Deuteronomium als Mitte biblischer Theologie,” in Probleme biblischer Thwlolgie, pp. 155-170

14) Edmond Jacob, Grundfragen alttestamentlicher Theololgie, Stuttgart, (1970), p. 18.

15) 게하르드 하젤, op. cit., pp. 201-206.

16) 빌 아놀드 & 브라이언 베이어, 「구약의 역사적 신학적 개론」 류근상 & 강대흥 역, 서울:크리스챤출판사 2000, p. 104. “아담과 하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대표하는 창조물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들이란 사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 창조되었음을 함축한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 맺음은 많은 피조물 중 인간만이 갖는 특권 중의 하나이며 창조물 가운데 특별한 위치에 인간이 놓여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다.”

17) 홍인규, 「바울의 율법과 복음」,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6. pp. 208-236.

18) 홍인규,  op. cit., p. 240.

19) 찰스 크레프트는 기독교가 종교인가, 신앙이가? 에 대한 질문으로, 종교가 아닌 신앙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을 서술하였습니다. 신앙을 형성하고 있는 외형적인 부분을 종교로 보았고, 신앙을 본질로 보았다. 찰스 크레프트, 「말씀과 문화에 적합한 기독교」 김요한 & Peter kang Chrisina Kang & 백신종 역, 서울:생명의말씀사, 2007. pp. 143-166.

20) 윌리엄 다이어네스, 「주제별로 본 구약신학」 김지찬 역, 서울:생명의 말씀사. 2006. pp. 148, 167-168.

21) 시편 67편을 성경적인 근거로 인용하여.

22) 스티븐 호돈 & 랄프 윈터, 「Mission Perspectives」 정옥배 역, 서울:예수전도단, 2000. p. 51.

23) 스티븐 호돈 & 랄프 윈터, op. cit., p. 52.

24) Lofthouse, W. F, “Biblical Ethics” A Companion to the Bible, edited by T. W. Manson. Edinburgh:T. and t. Clark, 1942. p. 350.

25) 신 6:4.

26) 랠프 스미스, 「구약 신학」 박문재역, 서울: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5, p. 271.

27) 신 4:35, 39; 삼하 7:22; 왕상 8:60; 왕하 19:15; 시 86:10; 사 43:10-13; 44:6-8; 45:5-6, 21-22; 욜 2:27; 사 41:4; 48:12; 64:4.

28) 마우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는 바로 유일하신 분으로서 이스라엘의 온전한 헌신을 요구한다고 하였다. U. Mauser, Εἴs θεὀs und Mouos θεὀs in Biblischer Theologie, in:Einheit und Vidlfalt Biblischer Theologie (JBTh Bd. 1), p. 74.

29) 마 22:34-40, 눅 10: 25-28. 마가복음과 다르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하나님이 유일하신 분인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이미 기정사실화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이미 기정사실화되었기 때문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누락 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김재진, 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 속에 있는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신학논단 제21집, 서울:연세대학교 신과대학 1993, pp. 357-399. 복음서는 조금 다르게 이러한 최고 되는 계명에 대한 질문을 다르게 서술하였다. 산상수훈이 한번 가르쳐진 내용이 아니라, 여러 번 가르쳐진 내용인 것과 같이, 이것은 한번 질문을 받은 것이라기보다, 여러 번 질문 받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복음서들이 다른 관점에서 쓰여 졌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어지나. 성경은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30) H Strathmann, Das Evangelium nach Johannes (NTD 4), 4. Aufl., 1959. 참고.

31) M. Dibelius, Die Christianiserung einer hellenistischen Formel, in: Ders, Botschaft und Geschichte Ⅱ, Tubingen 1956, S, 14-29: E. Norden, Agnostos Theos, Untersuchengen zur Formengeschichte religioser Rede, Leipzig/Berlin 1913, S, 240-250. 참고.

32) E. A. 마튼즈,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김지찬 역, 서울:생명의 말씀사, 1990. p. 105.

33) 마틴 토이드 존스, 「산상수설교집」 문창수 역, 서울:홍진인쇄, 1991. p. 25.

34) 민 22장, 천사가 벌하기 위해 온 구절이 있다. 삼하 24:16; 대상 21:16.

35) 에드몽 자콥, 「구약신학」 박문재 역,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9, p. 87.

36) Ibid.,

37) Paul Humbert, “Les prophetes d’Israĕl ou les tragiques de la Bible”, RthPh, 1926, p. 229.

38) 에드몽 자콥, op. cit., p. 90.

39) 랠프 스미스, op. cit., pp. 142-192. 학계에서는 이러한 표현을 “계약 공식(Covenant Formula)”라고 불러왔다. 성경에는 이와 유사한 공식이 약 25번 사용되었다. 창세기 17장 7절에 선언하신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공식이 명확하게 처음 쓰인 곳이 바로 출애굽기 5장 22에서 6장 8절까지 이다. E. A. 마튼즈, op. cit., pp. 82-90. 참조.

40) 랠프 스미스, 「구약신학 그 역사, 방법론, 메시지」 박문재 역, 서울: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5. p. 195.

41) 발터 아이히로트, 「구약성서 신학」 박문재 역, 서울: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3. pp. 221-222.

42) 스티븐 호돈, op. cit., p. 49.

43) Baab Otto, “Old Testament Theology: Its Possibility and Methodology.” The Study of the Bible Today and Tomorrow, edited by H. R. Willoughby. Chicago: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43. p. 119.

44) 이렇게 많이 언급된 거룩을 구약의 주제라 생각한 사람이 있는데, 요하네스 하넬(Johannes Handel)이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45) 랠프 스미스, op. cit., p. 228.

46) 랠프 스미스, op. cit., p. 229

47) 랠프 스미스, op. cit., p. 2257.

48) 랠프 스미스, op. cit., p. 268.

49) Westermann Claus, Blessing in the Bible and the Life of the Chruch, Philadelphia:Forteress, 1978. p. 50.

50) 랠프 스미스, op. cit., p. 206.

51) 랠프 스미스, op. cit., pp. 206-207.

52) 대상 16:10, 28; 시 29:1. C3tv 온라인성경 사전검색, http://bible.c3tv.com/bible/dic

   /dic_view.asp?Page=592&Word01=&Word02=&OrAnd=&GWord=&MenuCd=4&BiDicCd=6591 (2013. 2. 24 검색)

53) http://biblenara.org/q&a/Q177.htm (2013. 2. 24 검색)

54) 기본어근 동사로써 카나(an:q;)이며, 명사형으로써 킨아(ha;n_qi), 형용사로써 카노(a/Nq') 혹은 카나(aN:q')로 사용된다.

55) 부족하지만 새번역 성경으로 찾아야 찾을 수 있다. 개역개정에는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지 않다.

56) 이 본문은 ‘다윗의 열심’으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다윗의 인생 전체를 통하여 다윗이 바라보고 섬겼던 하나님은 일반적인 수준 이상이었다. 심지어 잘못과 죄를 지었던 다윗을 향하여 하나님이 ‘마음에 합한 자’(삼상 13:14; 행 13:22)라고까지 하셨다. 이것은 다윗의 마음에 하나님의 질투를 소유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57) 이 본문은 ‘시편 기자의 열심’으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시편 119편 기자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심의 정도는 대단히 큰 열심이므로, ‘하나님의 열심’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58) 행 7:9, 행 17:5, 고전 12:31, 14:39; 갈 4:17, 18; 약 4:2.

59) 이 본문을 일반적인 ‘신앙적인 열심’으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성서에서 가지고 있는 질투(열심)에 대한 개념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열심’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60)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이 본문은 바울이 로마서 10장 18절에서 인용한 시편 19편 4절로써 히브리 원어에서는 온땅에 퍼졌고,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가 과거형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때 이루어진 일이며, 앞으로 일어날 일로 받아 들여야 한다. 시편기자가 시편을 저술할 때, 하나님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을 시편기자를 통하여 선포하신 것이 과거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때 이미 이루었다고 믿었다. 이 본문을 70인역 헬라어로 번역할 때 동일하게 과거형으로 번역하였다. 바울은 이 본문을 그대로 과거형으로 로마서에서 인용하였는데, 과거용법인 시편 19편 4절의 말씀이 자신의 시대에 실현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다윗시대부터 초대교회시대까지 이 용법이 이스라엘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61) 헨리 블렉가비,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여주봉 역, 서울:요단출판사, 2001. pp. 21-22.

62) 헨리 블렉가비, op. cit., p. 22.

63) 성경에는 ‘자녀’, ‘가라사대’, ‘하나’, ‘집’, ‘조상’, ‘사람’, ‘여자’, ‘먹다’, ‘너’, ‘이끌었다’, ‘다윗’,

64) 잠 9:15; 전 10:3.

65) 창 47:9; 신 1:31; 수 5:4; 수 5:5; 삼상 24:19.

66) 삼상 1:15; 삼하 15:34; 욥 13:16; 욥 24:22; 욥 29:25; 욥 36:26; 잠 19:5; 전 6:7; 렘 8:18; 애 3:20; 애 3:51; 나 3:19; 눅 5:19; 눅 7:42; 요 15:22; 히 12:25. 

67) 창 28:20; 출 23:20; 33:3; 신 28:29; 수1:5; 1:8; 삼상 26:25; 욥 13:27; 19:8; 22:28; 30:12; 31:16; 시 2:12; 18:32; 139:3; 잠 2:8; 3:6; 3:23; 5:21; 11:5,20; 12:26, 28; 13:6; 16:9; 18:16; 20:24; 21:8; 22:5; 31:3; 사 26:7; 45:13; 8:15; 렘 2:17; 23:12; 렘 32:39; 암 2:7.

68) 수 23:14; 욥 16:22; 왕상 2:2.

69) 사 사 35:8, 9.

70) 사 42:16.

71) 사 43:19.

72) 렘 50:5.

73) 욥 28:26; 38:25; 사 43:16.

74) 옵 1:14.

75) 시 4:1.

76) 겔 21:19-21.

77) 신 17:16; 28:68.

78) 렘 50:6.

79) 민 24:25; 왕상 1:49; 9:6; 22:43; 22:52; 왕하 13:2; 13:6; 13:11; 16:3; 17:13; 19:28; 19:28; 19:33; 왕하 21:21; 21:22; 22:2; 대하 7:14; 21:6; 21:11; 21:13; 22:3; 28:2; 느 9:35; 욥 22:15; 31:7; 34:27; 36:21; 시 1:1; 1:6; 14:3; 35:6; 36:4; 37:7; 53:3; 58:3; 106:6; 119:67; 119:101; 119:104; 125:5; 131:1; 146:9; 잠 1:15, 19; 2:15; 4:14, 15, 18, 19; 5:6, 8; 7:25, 27; 13:15; 15:9; 16:29; 11:9; 사 8:11; 19:13; 47:10; 55:7; 57:17; 59:7; 59:8; 65:2; 렘 8:6; 15:7; 18:11; 21:8; 23:13, 26:22; 32; 35:15; 36:3, 7; 겔 3:18, 19; 13:22; 18:23; 20:43; 20:44; 23:13; 33:8, 9, 11; 44:10, 15; 48:11; 단 9:13; 호 2:6; 4:12; 암 2:4; 욘 3:8, 10; 슥 1:4; 마 10:5; 행 13:10; 롬 2:19; 3:12, 16; 딤전 5:15; 딛 3:11; 히 2:1; 3:10; 히 5:2; 약 5:19, 20; 5:19; 유 1:11; 1:13.

80) 시 78:50; 시 80:12; 잠 2:18; 렘 4:7; 호 13:7; 계 16:12; 계 15:3.

81) 출 18:20; 신 30:16; 32:4; 삼상 8:3; 8:5; 삼하 22:22; 왕상 11:33; 욥 23:11; 시 23:3; 25:8; 37:14; 39:1; 44:18; 50:23; 51:13; 95:10; 101:2; 107:7; 119:3; 119:5; 119:9; 119:15; 119:26; 119:27; 119:29; 119:30; 119:32; 119:33; 119:35; 119:37; 119:105; 119:168; 119:176; 139:24; 143:10; 잠 2:5; 2:9; 2:13; 2:20; 3:32; 4:11; 4:27; 5:23; 6:22, 23; 8:20, 32; 9:6; 10:17; 11:3; 14:2, 8, 12, 22; 15:10, 19, 21; 16:17, 25, 31; 21:16; 22:6; 23:26; 28:6, 10; 전 12:10; 사 2:3; 3:12; 30:21; 42:24; 48:17; 53:6; 55:6; 57:2; 사 58:2; 렘 6:16; 7:23; 26:3; 겔 3:20; 단 9:13; 호 14:9; 미 4:2; 말 2:6, 8; 마 22:16; 막 12:14; 벧후 2:15; 히 3:10; 엡 2:1-3.

82) 마 3:3; 막 1:3; 1:2, 수 2:16; 사 40:3; 사 62:10; 말 3:1.

83) 창 24:40; 출 13:18; 13:21; 신 1:22; 1:33; 19:9; 28:25; 수 3:4; 삿 18:5; 18:6; 삼상 9:6;  9:8; 왕하 3:8; 느 9:12; 9:19; 시 5:8; 25:4; 32:8; 37:5; 37:23; 142:3; 143:8; 잠 14:32; 19:3; 렘 42:3; 롬 1:10; 고전 10:13; 고후 2:12; 살전 3:11

.

84) 신 8:2; 24:9; 신 25:17; 욥 28:23; 38:20; 시 25:8; 43:3; 86:11; 138:7; 25:12.

85) 사 57:14; 렘 31:9.

86) 사 55:8, 9.

87) 시 77:13; 77:19; 84:5; 85:13; 잠 3:17; 렘 3:21; 21:8; 겔 14:11; 호 7:13; 합 3:6.

88) 출 32:8; 신 8:6; 28:9; 31:29; 삿 2:17; 2:22; 왕상 2:3; 2:4; 8:25; 대하 6:16; 6:31; 17:3; 21:12; 27:6; 34:2; 욥 4:6; 24:13; 28:7; 시 1:6; 16:11; 17:5; 18:21; 23:3; 81:13; 잠 2:19; 사 63:17; 렘 4:18; 5:4, 5; 렘 18:15; 렘 31:21; 애 3:40; 겔 13:22; 미 4:2.

89) 마7:13-14; 마 21:32; 막 2:2; 눅 1:79; 눅 20:21; 행 18:25.

90) 행 2:28; 요 14:4.

91) 요 14:4-6; 행 2:28; 16:17; 히 9:8; 10:20; 행 9:2; 24:14; 24:24; 롬 3:17; 히 10:20; 벧후 2:2; 2:21.

92) 왕상 8:58; 사 11:16; 눅 13:33; 행 20:24; 히 11:25; 딤후 4:7.

93) 출 33:13; 왕상 8:36; 대하 6:27.

94) 마틴 로이드존스, op. cit., p. pp. 324-325.

95) 구약에서는 남은자에 대한 다양한 사상들이 있다.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 선자자가 말한 것 같이, 여기서는 하나님의 선택, 완전히 멸하지 않고 남겨 놓은자, 회복시킬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김바울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