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라


침례(세계) 요한의 등장은 유대 민족을 크게 흥분시켰다. 그의 복장과 전파한 말의 내용이 엘리야 같았기 때문이다(왕하 1:8).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엘리야의 역할을 완수할 것으로 이해하셨다(막 9:11). 그리고 그의 강력한 메시지는 구약의 선지자와 유사한 회개와 심판에 대한 것이었다.


“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침례(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7-10)


마가와 누가 역시 침례 요한이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마 3:11; 눅 3:3)를 전파하였다고 하였다. 회개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한 관문이며 침례(세례)는 그의 증표의 의식으로 행해졌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가장 첫 번째 조건은 ‘회개’이다. 예수님이 전하신 첫 번째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회개’였다.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선지자 침례(세례) 요한의 첫 번째 선포는 ‘회개’이었다.

 

회개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신앙의 회복의 첫 번째 단계는 ‘회개’이다.


A. 회개에 대한 잘못된 이해


회개를 다루기 전에 잘못된 회개에 대한 개념을 먼저 점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다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기독교를 내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회개와 별개의 것이다.1) 많은 죄를 지었으므로 헌금을 바침을 통해 또는 교회 봉사를 통해 죄를 사함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예배 참석하고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임을 통해 죄를 사함 받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외형적인 것들은 신앙의 표현이지, 본질이 아니다.


2. 얼마든지 회개하지 않고서도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할 수 있다


지식적으로 복음에 대한 모든 것을 동의하고 그것을 자신이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침례(세례)까지 받았다.2) 그러나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다. 이것은 회개와 상관없이 그렇게 고백할 수 있다. 그리고 전도하는 사람의 잘못된 이해 때문에, 전도 문구에 따라 기도하고, 회개를 전도하는 사람을 따라 기도함을 통해 자신이 죄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전달받게 된다. 이것이 회개로 이어질 수 있지만, 회개 기도를 따라 하는 과정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회개가 아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단순히 교리를 동의하고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복음이 아니다. 사탄도 우리가 진리로 믿는 교리를 진리로 동의하고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약 2:19).


3. 교육, 법, 가혹한 억제를 통해서 타락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그것은 죄를 못 짓게 강제로 막는 것이지 회개가 아니다.3)


4. 회개는 한순간이 아니고, 계속 일어나는 과정이다


한 번 복음에 대해서 듣고 깨달았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분이 나의 죄책을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죄책감도 느끼고, 제 나름대로 피상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삶의 개혁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이 사람은 회개한 것이 아니다.4)

 

회개는 과정이다. 회개는 어느 한 순간이 아니고 과정이다. 내가 어느 한 순간에 회개를 경험하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함 받고 나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완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버리는 그런 일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회개는 우리가 그 즉시로 결단하고 내리는 선택과 어떤 행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속해서 일어나는 과정이며, 근본적으로 인간 마음의 변화와 개혁이다.


5. 후회와 회개는 다르다


후회한 것을 회개한 것이라 착각할 수 있다.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울부짖으면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였다. 많이 볼 수 있는 광경은 교회의 어떤 집회 때일 것 같다. 설교 말씀이 끝나고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받자 자신의 잘못이 생각이 난다. 심각성을 인식하고 울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회개라 생각한다. 또 많은 목사들이 성도들의 이런 모습을 보며 회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회개로 이어질 수 있지만, 많은 경우 자신의 죄를 후회하여 울고 있는 것이다. 회개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회개를 경험하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이 오랫동안 속아 오고 있다. 많은 경우 후회하며 울며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경우이다. 서양 사람들보다 동양 사람이 이것을 더 잘한다. 강대상에서 인도하는 대로, 그 당시의 분위에 맞추어서 하라는 대로 모두 반응하지만, 그 때 뿐일 때가 많다.

 

후회하게 되면 조금의 변화가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 찰스 피니는 이것을 거짓 회개라 하였다. 자신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5)


6. 습관적인 회개의 문제점


회개의 한 가지 큰 오류가 있다. 그것은 계속해서 같은 죄를 지으면서 회개하기만 하면 항상 용서받는다는 생각이다. 이런 사람들은 죄를 반복하면서도 습관적으로 회개를 하고, 별로 가책을 받지 않는다.

 

흔히 그들은 자신들이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반복해서 짓게 된다고 말하면서 계속 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들은 주님의 구원의 능력과 하나님의 죄 사하심의 능력과 성령의 성결케 하시는 능력을 교리로 굳게 믿고 있다. 그가 내세우고 있는 이론에서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다르다.

 

죄를 짓고 회개하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자는 아직 회개하지 않은 것이다. 후회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후회한 것을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해 죄 사함으로 간주한 것이다. 회개는 자신의 처지를 보고 몸서리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사람을 가꾸어 가시는 것이다. 회개에 대한 바른 교리는 중요하지만, 회개 교리에 대한 확신 자체가, 우리를 회개케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올바른 이론을 자신이 동의하고 있는 자체로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다. 신앙은 실제이다. 이론이 아니다.


7. 행동의 변화보다 깊은 마음 속의 죄를 제거해야 회개이다


우리 시대 가장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는 회개가 있다. 이것은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것이다. 잘못된 회개에 대한 인식 때문에 정말 회개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에 대한 글을 쓰고 설교를 한다. 또한 자신이 진정한 회개를 하였다고 착각한다.

 

회개는 행동으로 더 이상 범죄를 짓지 않는다고 회개한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다. 자신이 사회와 이웃에 해를 끼칠만한 죄를 범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죄 없다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죄 지은 것을 후회하고 다시는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행동으로 죄를 다시 범하지 않는 것을 회개라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 가운데 동일한 죄를 짓지 않는 행동 자체가 회개라면서, 수많은 회개에 대한 설교와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성경에 그것이 회개라 한 적이 없는데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예수님의 기준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죄의 기준과 차원이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간음한 여인이 끌려왔을 때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돌리 치라면서, 인간의 마음 속의 죄에 대한 반성을 일으키셨다. 행위보다 인간의 내면의 동기와 죄성을 중요하게 여기셨다(요 8:7). 또한 간음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마음 속에 음란한 마음을 가진 것 자체가 간음한 것이라 말씀하셨다(마 5:28).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지만, 마음 속의 생각 자체가 바로 죄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마음 속의 죄에 대한 기준을 행동으로 국한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 속에 죄를 짓고 싶어 하는 마음 속의 충동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 속은 죄악으로 가득하지만, 행동으로 그것을 옮기지 않은 것을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고 방식 자체가 틀린 것이다. 회개는 단순히 자신의 잘못된 죄악을 다시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것을 가지고 회개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은 마음 속에 수많은 죄악 된 모습을 가지고서 행동적으로는 선하게 살 수 있다. 근본적으로 자신의 마음 속의 근원지를 뿌리 뽑지 않은 이상, 자신과 이웃에게 자신의 행동으로 변화된 것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자신의 죄의 근원지인 마음 속의 죄를 뿌리 뽑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이 필요하다. 우리 힘으로는 절대 우리 마음 속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죄의 근원지를 불태울 수 없다. 회개는 죄의 근원인 마음을 불태우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개념과 비슷한 수많은 설교와 책을 접해보았지만,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의 내면 속의 죄악을 뿌리 뽑으시고 인도하시는지 실제적인 내용들을 책과 설교를 통하여 나는 접해보지 못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설교를 들은 적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하여 죄를 이길 수 있는지 들어본 적이 없다. 이 문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B. 회개에 대한 잘못된 신학적 적용


나는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는 정확하게 맞지만,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잘못되어서 잘못된 신앙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현대의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한다. 그리고 한 가지 성경적이지 않은 것을 지적하려 한다.


1. 하나님의 ‘공의와 의’를 외치기보다, 사랑의 하나님을 외치기 쉬운 시대


1830년대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성경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있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것보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았다는 식의 태도이다. 오늘날 더욱 심각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론적인 교리가, 하나님 그분 자신을 인격으로 대하고 실제적인 신앙의 모습을 대체한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사랑의 하나님과 공의의 하나님의 대칭되는 하나님의 모습이 가려진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사랑이시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진노를 삭제해버렸다. ‘공의와 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모든 것을 삭제해버렸다. 특히 설교는 더 심각하다. 하나님의 사랑과 복과 성공과 그리고 치유에 초점이 맞추어진 설교는, 하나님의 공의와 의를 드러내지 않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성도들이 좋아하고 관심 있어 하는 설교에 집중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설교가 틀린 것이 아니고, 우리 가운데 적절하게 필요한 것이지만,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균형을 무너뜨리고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는 과오를 범한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의 공의와 의’를 외치면 자유주의 신학이거나 사회복음을 외치는 자라고 오해받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2. 회개를 외치기보다 회개에 대해서 외치는 시대


나는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성공과 복을 외치는 설교를 비판하는 글을 읽으면서, 그 글들 속에도 글을 쓴 사람에 대한 티를 보곤 한다. 그렇게 비판하면서 교리와 신앙노선을 강조하는 것이다. 바른 교리는 중요하다. 잘못된 신앙에서 돌이키는 것은 바른 교리와 신앙노선을 강조한다고 잘못된 신앙에서 돌아서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신앙노선만이 올바른 길이라는 결론이 많다. 모든 신앙을 교리적으로 설명한다.

 

나는 칼빈의 신앙이 나의 가장 밑바닥에서 기초가 된 사람이다. 나는 한국 땅에 칼빈주의 신학 개념 하나를 가지고 모든 신앙을 설명하고, 책들을 펴내는 것에 대하여, 나는 틀렸다기보다는 실제보다 이론이 앞서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 생각한다. 심지어 칼빈을 숭배하는 것 같은 이미지까지 준다. 또한 절대 섞일 수 없는 온건한 합리주의 신학인 세대주의를 칼빈주의로 포장하였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신앙노선이 하나의 방향이며 길이지 우주적인 진리는 아니다. 나는 ‘교리와 신앙이 나아가야할 이상’이 ‘실제’를 대체한 모습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정말 진리이고 신앙의 정통이고 바른길이라면, 예수님이 진짜 신앙에서 나타나는 것을 3가지 말씀하셨는데, 그중에 두 번째인 “하나님의 형용을 보는 것”(요 5:37), 즉, 영광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예수님은 진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데, 바리세인들은 이론만 가득하였지, 진짜 신앙의 실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영광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 주위에 흔히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 주위에 너무나 희귀하다 못해, 나는 이것을 목사들에게 설명해주어야 하는 수고를 늘 해야 한다.

 

신앙의 노선과 신앙 자체를 반박하는 것이 아니다. 이론이 실제를 대체해버린 상태에서 아무리 맞는 이론을 가지고 있어도, 바리새인과 같이 예수님께 버림 받게 된다.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바른 신앙의 실제의 문제이다.

 

우리 시대에 회개를 외치지만, 회개에 대한 성경적인 이론을 외친다. 나는 왜 성경에 회개에 대한 수많은 사건과 단어가 나오지만, 왜 회개에 대한 책이 조금밖에 없을까 생각해보았다. 내가 나름대로 결론 내린 것은, 회개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다. 천둥과 번개를 활자에 담을 수 없듯이, 회개를 활자에 담는 것은 지극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3. 신학적 요약이 준 피해 - 십자가는 죄를 사해 주신 것인가? 죄에 대한 책임을 사해 주심으로 결론적으로 죄를 사해 주신 것인가


하나님은 자비와 인애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의로우셔서 죄를 용납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용서하실 때는 의로운 방식으로 용서 하시는데, 우리의 죄의 책임에 대한 방법을 마련하였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의 중대한 핵심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가 당할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을 예수 그리스도께 담당 시키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벌하셨다.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죄에 대한 모든 책임을 물으셨다.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을 믿고 예수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는 자에게는, 자신이 받을 죄에 대한 책임이 그리스도에게 옮겨질 것이고, 하나님은 그 죄책을 벗은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자비롭고 은혜롭게 대하신다. 그래서 죄책에서 벗어난 우리는 죄를 사함 받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죄 자체를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하지 않았다. 죄에 대한 책임을 전가함으로 결론적으로 죄를 사하셨다. 이것은 우리시대에 중요하다. 사소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주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고 믿고 있다. 또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신앙생활에 대한 성경공부 책의 대다수가 단순하게 설명하고 있다. 교리적으로 죄를 사하신 것이 아니라, 죄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킴으로 죄를 사하셨다는 정확한 교리를 설명하는 목사님들이 극히 일부밖에 없는 것 같다.

 

죄 사함에 대한 성경에서의 정확한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문제뿐만이 아니라,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정확한 진리가 우리의 삶에 실제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전가했다는 교리로 그쳐버리면, 그 뒤에 심각한 신앙의 왜곡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이 시대에 가장 심각한 것 중에 하나는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타락하였는지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막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러한 죄에 대한 교리 자체가 미묘하게 변질함으로 자신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죄를 전가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교리는 우리를 더 이상 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경향으로 인도하고 있다. 성경은 죄를 전가한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책임을 전가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죄를 예수님께 전가하였다는 것은 우리에게 죄에 대한 심각한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것은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서, 우리 신앙을 병들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보지 못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는 것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다. 자신에게 선한 것이 없되 하나도 없는 것을 볼 수 없다.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사하여 주었다는 요약된 교리는, 미묘하지만 우리 삶 가운데 죄책감이 밀려오는 것에서 자유를 주고 해방감을 주는 역할을 한다. 즉, 원래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에 대하여 볼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처절하게 심각한 상황임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 미묘한 차이가 지속적으로 매일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교리적으로 자신이 그렇게 단정해버렸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고 있는 십자가의 삶을 살지 못하게 방해한다.

 

죄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였다는 것에는, 자신이 지은 죄책감도 수반된다. 죽을 것만 같다. 내가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된 것을 믿지만, 죄책감은 그대로 있어서 자신이 죽어지는 경험을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는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은 인간의 회개가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는 요약된 교리 자체가 미묘한 차이지만, 우리를 죄책감에서 해방시켜 더 이상 죄의 심각성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한 회개를 하지 못하도록 인도하고 있는 요인 중에 한 가지이다.


3. 칭의와 성화 두 가지 개념이 준 피해


회개의 결과, 우리는 죄책감과 속박으로부터 해방된다. 서양 사람들의 설명 방식에 따라 칭의를 한번 살펴보자. 칭의는 법적용어로서 칼빈의 종교개혁의 핵심진리 중의 하나이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우리의 죄책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된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선하고 의롭다고 칭해 주셨을지 모르지만, 나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다시는 정죄 받지 않을 견고한 마음의 안식을 준다. 칭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될 수 있는 출발점을 제공해 준다.6) 의롭게 된 사람은 죄책감, 노예상태, 소외의 문제를 모두 제거하거나 해결한, 완전히 변화된 사람은 아니다. 칭의 이후에 추구해야할 목표는 성화이다. 칭의가 멋진 출발이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안주해서는 안 된다. 구원에 대한 단순한 진리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만남과 함께 그분의 기준 앞에 서야한다.

 

나는 서양 사람들의 논리로는 칭의와 성화라는 두 가지 명제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가지를 분리시켜서 말하고 있지 않다. 칭의와 성화는 성경에서는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 사고 방식에 따라 발전된 개념에 맞추어서 설명하다 보니 두 가지를 엄격히 구분하였지만, 성서는 그렇게 명백하게 구분한 적이 없다.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다.

 

오늘날 목회 현장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각각 나누어서 강조하지만, 회개의 결과로 나타나는 성화는 이상하게 사람들의 마음에서 뒷전으로 항상 취급되어져 버린다. 신학적으로 설명하기에는 좋지만, 우리 시대의 목회 현장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큰 피해를 주는 것이라 하겠다. 나는 칭의와 성화와 관련된 통합된 설명 방법이 개발되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강조해도 성도들은 두 가지를 따로 떼어서 생각하려고 한다.


4. ‘영접하라’와 ‘회개하라’의 용어 사용


토저(A. W. Tozer)는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 사용을 가지고 회개와 결부시켜 중요한 일침을 놓았다.

 

토저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을 설명하기 위하여 ‘영접한다(aceept)’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치러야 할 모든 대가를 뒤로한 채 지금 보이는 열매를 위하여, 십자가 사건과 주님의 죄의 용서만을 외치고, 우리가 회개하고 대가를 치러야 할 모든 것을 생략해버리는 것을 통탄하였다.


오늘날에는 믿음의 초기 행위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고 있다. 어느 특정한 순간에 그리스도를 향한 ‘결단’이 이루어지고, 그런 뒤에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 회심자를 만들어내려는 열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단 한 번에 걸친 믿음의 행위를 통하여 전반적인 책임을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기도록 내버려둔다. 이것은 다소 모호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공로를 돌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게 한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그러한 자세는 그리스도를 진리의 성경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괴상하고도 쓸모없는 체계를 만든 분으로 전락시킨다.7)


이렇게 외친 토저가 죽은 지 반세기 이상 지나버린 지금, 우리시대는 여전히 허울 좋은 영접 개념을 지속적으로 외치고 있다. 이렇게 외침으로 교회가 성장한 것도 아니다. 또한 이러한 여파로 인하여 목회자로부터 성도들에게까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들과, 여전히 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로 가득하게 할 뿐이다.


5. 회개와 자백에 대한 오해(회개는 한번만 하는 것이고, 자백은 계속 해야 된다는 잘못된 진리)


a. 회심과 회개


국어에는 회심(會心)과 회개(悔改) 두 단어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회심은 ‘마음을 돌이켜 먹는다’는 의미로써 기독교에서는 ‘과거의 생활을 뉘우쳐 고치고 신앙에 눈을 뜬다.’8)는 뜻이다. 회개는 ‘죄나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고쳐먹는다’는 의미로써 기독교에서는 ‘과거의 생활을 뉘우쳐 고치고 신앙에 눈을 뜬다.’9)는 뜻으로 설명하지만, 두 단어는 같은 의미이다.

이 단어를 가지고 기독교에서 회심은 처음 신앙을 시작할 때 과거의 생활에서 뉘우치는 것이고, 회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 ‘회심’과 ‘회개’ 이 두 단어는 불신자이든 기존 신자이든 모두가 해당된다. 언어 사용에 있어서 회심과 회개는 모두 동일한 언어이고, 나누어져서 따로 사용하지 않는다. 한국말로는 다른 표현이지만, 성경은 분리된 단어가 아니고 같은 의미이다.


b. 회개와 자백


신약성경이든 구약성경이든 성경의 대상이 대부분 믿는 자들이었다. 특별히 신약성경은 서신들이 성경으로 정립되었는데, 편지의 독자가 모두 기존의 교회 공동체들이었다. 즉,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대상이었던 것을 보았을 때, 회개라는 단어의 사용도 모두 이미 믿고 있는 성도와 믿지 않았던 사람들 모두 해당되는 말씀이다.

 

일부 회개와 자백의 의미를 예를 들면서 잘못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회개는 불신자가 혹은 완전히 회개를 하지 않은 자가 해야 할 것이고, 자백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 하는 것으로 가르친다. 회개는 일생에 있어서 단 한번 있는 것이라 가르친다. 하나님께 몸과 마음과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본다. 그래서 사람의 중심은 하나님만 아시겠지만 어쨌든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면 하나님께 몸과 마음과 목숨을 바친 것이 되기 때문에 회개는 단 한번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양쪽에 죄수 두 명이 형틀에 매여 있었다. 왼쪽 강도는 예수님을 저주 했고 오른쪽 강도는 주여 주님 나라가 가실 때 저를 기억해 달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오른쪽 강도는 회개를 한 것이고 자백할 시간은 없었다. 그러나 단 한번의 회개로 예수님과 함께 간 것이라 설명한다.

 

그리고 자백은 말 그대로 죄를 자백하는 것으로, 지은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맞는 말이다.

 

처음 구원의 교리를 받아 들이 때 한번만 회개한다는 것은 성경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진리가 아니고, 한국어가 가지고 있는 회개에 대한 표현법에 착안한 자기의 논리를 가지고, 성경의 구절을 끌어들여 설명한 것이다. 성경은 회개를 불신자 혹은 완전히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향해 한번만 하는 것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회개의 대상자를 불신자와 성도 모두 동일하게 사용한다. 회개는 복음의 진리 앞에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과, 구원 이후 자신의 삶 가운데 회개 하는 것 모두를 의미한다.


C. 회개는 신앙과 사역의 출발점이다


자기 중심의 생활 양식에서 돌이켜 하나님 중심으로의 생활 양식으로, 삶의 전환이 회개이다. 자기 중심의 사고 체계에서 하나님 중심의 사고 체계로의 삶의 전환이 회개이다. 자기 중심의 목적과 목표에서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가 삶의 목적과 목표로 전환하는 것이 회개이다.

 

지금까지 내가 언급한 회개가 아닌 것들을 접하면, 어떤 사람들은 심각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에 무거운 짐들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내가 책을 통해 알게 된 신앙의 위인들과 2000년 기독교 역사가운데 부흥 때마다 일어났던 공통점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몇 개월에서 10년 이상, 자신이 진정으로 회개치 못하는 것 때문에 지옥을 경험하였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정상이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첫 번째 단계이다. 자신의 죄에 대한 고뇌 때문에 죽어지는 경험은 처음 회심할 때 잠시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명령에서 침례(세례)를 주라 하셨다(마 28:19-20). 침례는 예수님을 따르는데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은 회개와 연결되어 있다. 또한 우리는 회심자와 제자를 구분하여 사용하기도 하는데, 성경은 그렇게 구분하지 않았다.

 

나는 자신이 회개치 않고 아직도 죄악 가운데 있는 것 때문에 몸서리치는 반응을 하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참 모습이다. 자신을 보지 않고는 절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없다. 위의 내용들이 자신에게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도 죄에 대하여 민감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수많은 연단과 고난 속에 내버려 두어서 정신 차릴 때까지 기다리실 것이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구원에 대한 소망만 가진 상태로 더 이상 신앙의 진보가 일어나지 않는 신앙의 어린아이 모습으로 한평생 살 것이다.

 

진정으로 회개치 않고 주님을 위해 수많은 사역을 할 수 있고, 놀라운 성과도 만들 수 있고, 교회를 성장시키고, 유명한 목회자로 이름을 날릴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는 아무런 상관없고, 하나님이 명하지도 않은, 자기가 하나님께 해 드리고 싶은 사역을 할 뿐이다.

 

회개가 신앙과 사역의 출발점이다. 무조건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헌신을 통해 무언가 열심히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신앙도 아니고 사역도 아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길을 알고 그 길로 가야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길을 알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무언가 주님을 위해 주님이 기뻐하실만한 것을 찾아서 무작정 시작하고 본다. 우리 시대 가장 큰 죄가 바로 하나님의 길을 알려고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주님을 위해 성경에서 주님이 기뻐하실 만한 것들을 찾아내어서 자기 길을 만들어서 시작하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고개를 돌리시게 하는 원인인줄 모른다.


복음주의자들은 흔히 회심과 사역에로의 부르심을 명확히 구분한다. 그러나 공관복음에서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한 사역에로 부르심은 원래 회심을 향한 부르심, 또는 경험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10)


D. 구약에서 회개의 단어적 의미


구약에서 ‘회개하다’에 해당하는 단어로서 나함(!j'n:)이나 슈브(bWv)가 많이 사용되었다. 히브리어 슈브(bWv)는 움직임을 나타내는 동사로 그 기본적인 의미는 원래 있었던 곳으로 움직이는 것, 즉 ‘돌아오다’, ‘되돌아오다’이며 이것이 발전하여 신학적 성서 용어 해설로는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것’, 즉 회개를 의미한다. 특별히 니함은 주로 니팔 형태로 사용되면서 감정의 변화를 의미한다.11)

 

예언서에서 회개의 목적은 원래 상태를 다시 회복하는 것, 즉 하나님과의 원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돌아감은 단순히 옛날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원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12)

 

슈브가 의미하는 회개의 신학적인 개념에 있어서 기본적인 전제는 방향의 전환이다. 이러한 방향 전환에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회개의 과정은 예레미야 3장 22절부터 4장 2절에서 명확히 묘사되는데 그것은 회개의 참된 예전,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렘 3:22),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렘 3:23), ‘제(저희)가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말로 자백하는 것(렘 3:25), 부끄러움을 인정하는 것(렘 3:25), 새로운 행동을 하기로 맹세하고 지키는 것(렘 4:1-2)이다.

 

구약성경은 슈브를 통해 기본적으로 ‘돌아오다’ 를 의미하며 돌아오기 전에 했던 악행, 폭력, 우상숭배 및 죄 등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서고 돌아가는 것이다.13)

 

이처럼 구약에서의 회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전부인 삶으로의 전환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전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삶으로의 전환이 회개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이 내 인생의 유일한 전부인 그런 삶으로의 전환을 구약에서는 회개라 하였다.


E. 신약에서 회개의 단어적 의미


회개라는 단어는 에피스트레포(ἐπιστρέφω)로 쓰이면서, 메타멜레이아(μεταμελεια) 와 메타노이아(μετανοια)라는 단어가 신약에 많이 쓰인다. 예수님이 회개하라고 외친 단어는 메타노이아이다(Metanoei'te). 이 단어는 ‘생각이나 태도의 변화’ 혹은 ‘다른 관점을 취하다.’를 뜻한다. 이러한 변화는 느낌이나 감정, 혹은 의지나 생각에 영향을 끼치며 단순히 이지적인 사유의 결과에 따른 생각의 변화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14) 하지만 코이네 헬라어에서 이 말은 주로 단순히 ‘생각의 변화’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15)

 

신약에 사용된 회개의 단어적 의미보다, 구약의 회개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하여 헬라어에서 사용되고 있는 회개의 단어를 차용하여 사용한 것이 신약의 회개 단어이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많이 사용되었다.16)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실제가 되도록 설명하셨는데, 회개는 헬라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넘어서서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들이었다.

 

회개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들에 대해 헌신을 요구한다(눅 10:13, 11:32). 따라서 회개는 반드시 하나님 나라의 선포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막 1:15). 즉 예수님이 선포한 회개는, 소극적인 ‘돌아섬’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하고 있는 ‘구원’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무엇보다 누가에게 있어서 회개는 죄의 용서(행 2:38, 3:19, 5:31, 8:22) 혹은 침례(세례) 및 구원(혹은 성령)(행 2:38, 11:18)을 받아들이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누가에 따르면 회개는 용서의 전제이자 구원을 받아들이는 데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바울 서신에서는 유대 전통을 따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내하심이 인간을 회개에 이르게 하지만(롬 2:4), 반대로 ‘회개하지 않는 마음’은(롬 2:5)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고 언급하였다. 고린도후서 7장 9절 이하와 12장 21절에서는 회개가 ‘마음의 변화’라는 다소 약화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회개를 통해 요구되는 삶은 주로 ‘믿음’이라는 개념에 복속되어 있기 때문에, ‘회개’가 명시적으로 부각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곧 바울이 회개를 중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외의 다른 서신들에서 회개는 올바른 가르침과 행실로 돌아섬(딤후 2:25), 죽은 행실로부터 돌아섬(히 6:1), 신성모독으로부터 돌아섬(벧후 3:3 이하) 등의 의미로 사용되며, 특히 베드로후서에서는 회개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경건한 삶의 실현과 연결되어 있다.17)

 

실제로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용례들에 기초하여 생각할 때 이 용어는 어원적이거나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전인이 무엇인가로부터 돌아서서 새로운 삶이나 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신약성경은 이 말을 단순히 ‘회개’(repent)라는 뜻으로만 사용하지 않고 그 의미를 심화시켜 하나님을 향한 영적이고 윤리적인 태도의 온전한 변화를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약성경의 회개는 순수하게 외적인 돌아섬이나 단순한 내적인 생각의 변화가 아니라 양자 모두를 포괄하는 ‘진정으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회개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사용은, 모두 인격적인 하나님 그분과의 관계 회복으로의 삶의 전환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그리고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으로 전환하는 것을 회개라 하였다. 신약의 복음의 개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가지려고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유일한 목표이며 목적이 되는 삶으로의 전환이 회개이다.


F. 회개의 과정


1. 자기 처지를 인식하는 것


회개에서 자기 처지를 인식하는 것만큼 중요한 출발점은 없는 것 같다. 우리 신앙의 궁극적인 출발점이기도 한 이것을, 지금 시대에는 교리가 대체해 버리고 말았다. 신앙의 실제가 서야 할 자리에 이론이 실제인 양 자리매김하고 있다.18)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자신이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안다고 착각하고 산다. 하나님을 경험함을 통해 직접 체험하고 영광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회개와 전적인 타락에 관한 온갖 이론으로 가득한 학설들을 많이 아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이 대단히 높다고 생각한다. 바른 교리가 중요하지만, 교리가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과연 바리새인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이단으로 규정하신 적이 없을 정도로 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바리새인이 하는 말은 모두 순종하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시며, 그들의 신학이 문제가 없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하셨다(마 23:3). 바른 교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알게 하는 안내서이다. 중요한 것은 실제이다. 문제는 실제가 무엇인지 감도 못 잡고 있다. 신앙은 실제이다. 이론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이론과 실제를 강조하는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론을 실제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자신은 이해하였다고 말하고 자신이 경험한 극적인 일부분을 부풀려서 이야기 한다. 신앙의 실제에서는 그것과 아무 상관없이 살며,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는데도 말이다. 신앙의 실제에 있어서 자기 처지를 인식하면 절대 바리새인과 같은 태도를 갖지 않는다.

 

성경이든, 예수님의 부활 이후 2000년 역사 동안 동방정교회, 로마가톨릭, 개신교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에서, 하나님은 동일한 방식으로 신앙을 회복시키신다. 마틴 로이드존스는 부흥이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오는데, 첫 번째가 자기 처지를 인식하는 것이라 하며, 교회사에 일어난 어떤 위대한 영적 운동에 대한 기록이든지 다 읽어보라고 그의 책 ‘부흥’을 통해 촉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책을 읽어보았다.19)


첫 번째 과정은 항상 자기 처지를 인식하는 것이었다. 2000년 동안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 그래서 다 읽어보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단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20)


하나님은 회개로 인도하실 때 항상 자기 자신의 처지가 어떠한지 여실히 보게 하신다. 많은 사람이 교회가 현실 가운데 처해 있는 무기력함에 분통하며, 그것이 회개의 처음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생각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자기 자신이 천리만리 하나님 앞에 떨어져 있는 상태인 것을 보는 것이다. 자신이 너무나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어서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못할 것만 같은 상황에 부닥친 것을 인식하고 애통해한다. 사실상 자신의 처지를 보게 되면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자기 코가 석 자인데 다른 사람이 보이지도 않고, 교회의 상황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지옥에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사실 앞에 애통해한다.


자신의 처지를 보는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기준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 앞에 자신을 올려놓고 자신의 처지를 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자신의 관점이 바뀌면서, 하나님의 법에 나 자신이 바른지, 지금 내가 하나님을 떠났는지, 초점이 맞추어진다. 또한 하나님의 성품 앞에 직접 서서 하나님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을 보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이끄신다. 절대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기준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기준을 지식적으로는 동의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기준 앞에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는 것은 성령의 임재가 없으면 절대 불가능하다.


2. 회개는 선하신 하나님을 선명하게 인식하고, 자신을 볼 때마다 지옥을 경험하는 것이다


고든 스미스(Gorden T. Smith)는 회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하였다.21)


회개는 어떤 진리나 원리나 영적인 법칙과의 만남으로 나타나는 결과가 아니라, 다만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 진다. ...... 예수님과의 만남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회개를 제대로 성찰할 수 없다.22)


우리시대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인격적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만남과 교제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많이 알고 있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리적으로나 이론적인 지식을 알고 있는 것으로 자신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종교적인 예배나 봉사와 사역을 하고 있고, 경건의 시간과 전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한번도 외적으로 드러나는 그러한 행위 자체가 하나님과의 교제라 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담는 그릇일 뿐, 하나님과의 교제 자체는 아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그 그릇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릇은 그릇일 뿐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직접적이고 사실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인격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이 가지고 계신 기준을 보게 되면, 일시적으로 공황상태와 유사한 현상이 일어난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고,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오직 자신이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것만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공황상태와 다른 차원이다. 공황상태도 똑같은 증상을 보이지만, 그것은 병으로 그런 것이다. 정확한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공황상태는 어느 순간 갑자기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발생하는 법칙도 없다.23) 그러나 회개는 다르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자기 처지를 인식할 때마다, 그리고 하나님 기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을 깨달을 때마다, 지옥에 떨어지는 자신을 보게 된다. 공황상태와 다르게 선하신 하나님을 선명하게 인식하고, 자신의 모습을 볼 때마다 지옥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멀리 떨어져 있는지 정도에 따라 강도는 다르게 느껴진다.

 

또한, 이러한 부흥 때마다 일어나는 회개 현상을 ‘군중히스테리’로 설명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카이슨(Carson)박사는 반대되는 증거들을 제시하였다.24)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보고, 하나님의 성품과 선하심을 보았다. 그리고 첫 번째 한 말이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 이었다.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죄인인지 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말을 하였다는 설명을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보게 된다. 이것은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그 메시지를 듣고, 제자를 예수님이 선택하시는 장면이 성경에 나온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베드로는 자신이 천리만리 하나님을 떠나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할지 아무것도 판단이 안 된다. 마음의 혼돈도 혼란도 없다. 오직 자신이 지옥에 가까이 있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예수님이 제자로 자신을 사용하겠다고 하여도, 자신은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베드로는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의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역사적으로 항상 이러한 회개의 과정을 통해 회복되어져 왔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회개의 메시지에 반응하였고, 자기 처지를 인식하고 지옥에 떨어지는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반응과 같이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죄인이라는 인식 때문에 고뇌하는 자를, 자신의 제자로 받아 들이셨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자신의 제자로 선택하신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자기 처지를 인식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신앙이 회복되는 가장 기초가 되는 처음 출발은 자기 처지를 인식하는 것 즉,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보는 것이다.


3. 회개는 마음 아픈 과정이 있다


회개를 결단이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회개는 결단 이상의 하나님의 개입이 있다. 회개는 변화된 삶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하는데, 회개를 통해 변화되는 삶에도 회개의 과정이 있다. 이 회개의 과정이 없다면 십자가가 지금 우리의 삶에 의미가 하나도 없다. 단지 교리 상으로 동의하고 부르짖는 십자가 “지금 우리에게 생명이요 능력이라” 말만 멋지게 하는 것과 같다.

 

수많은 사람이 후회한 것을 회개한 것으로 착각한다.25) 이미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후회하며 마음 아파하고 울며 기도하는 것은 후회이다. 물론 회개도 똑같은 과정을 가지지만, 후회와 회개는 근본적으로 다른 상태에 있다. 중요한 것은 모두 하나님이 다루실 때, 삶의 모습과 환경은 다르지만, 회개는 후회보다 더 깊은 의미가 과정을 통해 진행된다. 바울은 후회와 회개의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나는 말을 하였다.


“내가 그 편지로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편지가 잠시나마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을 알고서 후회하기는 하였지만, 지금은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아픔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픔을 당함으로써 회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아파하였으니, 결국 여러분은 우리로 말미암아 손해를 본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함으로써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이 나타낸 그 열성, 그 변호, 그 의분, 그 두려워하는 마음, 그 그리워하는 마음, 그 열정, 그 응징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모든 일에 잘못이 없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새번역, 고후 7:8-11)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단호한 편지를 세 번째 보낸 것이 고린도후서이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쓴 첫 번째와 지금 전해지지 않는 두 번째 쓴 편지를, 모두 함께 읽고는 심각한 자신들의 처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음에 아픔을 당하였다. 가슴이 아프고 애통하고 자신들의 죄책감에 휩싸였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 과정을 통하여 신앙의 수많은 변화를 경험하였다. 이것이 중요하다. 사도 바울은 “마음 아파하는 과정” 이것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회개에 이르렀다 말하였다. 즉, 죄의 심각성을 알고 그 죄 때문에 죽어지는 경험을 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인도하였다.

 

8절, 9절, 10절, 11절에 계속 반복되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마음아픔”이라는 단어이다. 다른 번역본에서는 상심, 근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마음에 가책을 받고(ejluvphsa) 슬픔과 고통과 고뇌(luvph)를 느꼈다. 모두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는 가슴에 몰려오는 죄의 심각성 앞에 괴로워하고 애통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죄의 심각성을 갖게 되므로 고린도교인들은 열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게 되었고, 의분이 생겼고, 두려워할 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하나님께 헌신하려는 마음이 생겼고, 악을 징벌할 줄 알게 되었다(고후7:11).

 

이것이 회개에 대한 완벽한 정의라고 마틴 로이드존스는 말하고 있다. 회개는 단순히 순리대로 되지 않은 것 혹은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것의 섬뜩함을 인식한다. 잘못된 것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다.26) 고린도 교회는 그 문제를 스스로 질책하였으며, 그리고 자신들을 미워하였고 자신들에 대하여 복수를 하였다. 이것이 회개의 진수이다.27)

 

출애굽기시대 하나님 앞에 우상을 부어 만든 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또한 이와 같았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그것을 섬겼고, 자신들이 만든 여호와라 이름 하는 우상 앞에서 춤을 추었다. 그들은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인지, 뼛속 깊이 경험한다. 모세로부터 전해 듣는 참담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통곡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삶 가운데 기쁨을 줄 만한 것을 제거한다. 장식품을 모두 제거한다(출 33:4). 그리고 하나님 그분만이 유일한 모든 것 되는, 사랑의 마음이 나누어져서는 안 되는 질투라는 이름을 가진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다(출 34:14). 백성들은 자신들이 보아도 이것이 이렇게 나쁘거든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어떠한지 인식하고 괴로워하였다. 그들이 죄를 범한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심각한 죄인지 인식하였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것을 미워했으며 혐오했으며, 철저하게 자신들을 정죄하였다. 이것이 회개이다.

 

지금 우리 시대는 죄를 지어도 그리고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여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죄의 민감성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교리적으로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사하신 교리를 재빨리 잡아버리기 때문이다. 마음아픔의 과정이 생략되어 버렸다. 이 마음아픔의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회개를 경험하지 못하고, 십자가의 삶도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전환이 되지 않는 것이다.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하였듯이, 눈을 들어 인격적인 하나님을 처다 보지 못하는 과정이 바로 마음아픔의 과정이다. 예수님은 세리의 이러한 기도에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받았다고 하였다(눅 18:9-14).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랬던 것처럼 회개에는 감정이 중요하다.28) 또한 요한 웨슬도 감정에 우선순위를 두었다.29) 감정이 배제된 회개는 회개가 아니다. 가슴 아픈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4. 회개는 임재와 연관이 있고, 죄에 대하여 민감해진다


하나님이 회개의 마음을 주시고 인도하시면, 전체적으로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만드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연관이 있다. 고든 스미스는 회개는 임재이며,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경험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맛보는 경험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또 다른 이 실체는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임재이다……. 이것은 절대로 기적적인 경험이 아니다. 그와는 전혀 반대다. 인간적이고 일상적인 요소들이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경이로운 은혜를 쉽게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다.30)


주님이 임재하시고 주도하시면, 지금까지 별 의미 없이 지나쳤던 일들이 마음속에 지속해서 하나님의 의중을 묻게 된다. 성경은 다른 표현으로 성령이 하신 것이라 하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기도 한다. 자꾸만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졌는지 점검한다. 그리고 죄책감 때문에 견딜 수 없게 된다. 성경에 나와 있는 죄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시작한다. 마음 속에 미움을 가졌던 사람과 마음 속에 서운한 마음을 가졌던 모든 사건 가운데,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기준 앞에 자신이 견딜 수 없어서 마태복음 5장 21 ~ 26절처럼, 마음에 걸리는 모든 사람들을 찾아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 만나지 못하는 처지에 있으면 눈물로 편지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 얼른 그와 화해하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겨주고, 재판관은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어서, 그가 너를 감옥에 집어넣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 (새번역, 마 5:21-26)


용기만으로 자신이 가졌던 미움의 대상에게 찾아가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 고백하고 자신이 미워했던 사실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 미워하였던 그 사람의 잘못된 행동이 옳고, 자신이 틀렸다고 인식하게 될까 봐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순종을 두려워한다. 말씀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지만, 순종의 마음만으로 자신이 모든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지 못한다. 오직 성령이 일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특별히 부흥시기에 하나님이 사용하신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메시지에 회개로 나아갔던 수많은 군중들이 모두 동일한 모습이었다. 하나님이 회개로 이끄시면,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떠나있고 진노 아래 놓여 있는지 인식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다. 회개는 우리 삶 가운데 죄에 대하여 민감함을 준다. 임재가 깊을수록 회개는 진하게 일어난다. 우리의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다.


나는 하나님의 기준을 처음 보고 내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았을 때, 제일 먼저 내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또 성경 말씀이 그것을 증명하고 지속적으로 나의 마음 속에서 맴돌았다. 내가 상처를 주었을만한 사람들을 생각해냈다. 또 내가 상처받고 미워하고 서운해 했었던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과거에 나 때문에 받은 상처가 있었다면 나를 용서해달라며 용서를 구하고 다니기 시작하였다. 또 직접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은 이메일이나, 전화로 그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나는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결심하고 용기를 가지고 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생각하니 죽을 것만 같은 마음 이었다. 내 사모하는 주님이 지금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고, 내가 주님의 얼굴을 내게로 돌리시게 하는 방법은, 나의 마음속에 지금 걸리는 모든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용서를 구하러 다녔지만 아직도 기회가 닿지 않아서 용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남아 있다. 내 마음 한편에는 수년간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다.

 

또한 나는 내가 발견한 마음 속의 죄악 때문에, 늘 그래왔던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 죽어지는 경험을 하고 싶어도 못할 때가 있다. 담담한 마음뿐이다. 그것은 임재와 관련된 것 같다. 회개는 주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주님이 인도하신다. 내가 주님이 인도하셨던 수많은 회개의 경험을 토대로 그렇게 나아가려 해도 나 자신이 그렇게 못 나아갈 때가 있다. 이것을 통하여 나는 회개는 주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계심을 경험한다. 비록 지금까지 경험한 것과 같이, 주님 앞에 엎드려 죽어지는 경험을 하지 못할지라도, 나의 마음 속에 발견되어진 죄악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나의 선함이 없음을 주님께 인정하고 도우심 간구한다. 죽어지지 않는 마음 즉, 임재하셔서 다루시지 않더라도 주님 그분으로 만족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때가되면 나를 다루신다.


5. 회개는 압도적인 권세에 밀려 영혼의 고뇌에 빠진다


부흥을 경험한 청교도들의 회개를 Jerald C. Brauer는 다음과 같이 연구하였다.


청교도들의 회심 간증은 일반적으로 깊은 내면의 혼란과 씨름 후에 일어난 하나의 사건을 지향하였다. 한 걸음씩, 점차적으로, 한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한 법 앞에서 개인적인 죄악의 공포와 맞닥뜨렸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과 거룩이라는 명령에 깊은 좌절감을 맛보았다. 이 때문에 결국 그 사람은 모든 것을 포괄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깊이 깨달을 수밖에 없으며, 전적으로 새로운 삶의 방향 전환을 통하여 삶과 죽음을 모두 경험한다.31)


회개는 단순히 죄를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해 고뇌함으로 죄를 깨닫는 것이다. 단순히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인인지 깨닫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압도적인 권세에 밀려 심지어 육신적으로 아픔을 당하게 된다. 이것을 “영혼의 고뇌”라고 한다. 특히 부흥시기의 기록들에서는 일상과 같이 나타난다. 이것은 하나님이 신앙을 회복하시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실 때 동일하게 사용하신 하나님의 다루심이다.


존 번연은 자신의 책 “넘치는 은총 Grace Abounding"에서, 18개월 동안 어찌나 죄의식의 고뇌 속에 사로잡혀 있었던지, 들에서 먹이를 찾고 있던 기러기가 부럽기까지 했었다고 토로한다. 차라리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나을 뻔했다고 생각했다. 이 고뇌, 이 무시무시한 죄책감, 부흥이 일어날 때 이러한 의식을 가질 수 있다. 사람들이 영혼의 고뇌를 하며 애통해한다. 그들은 울부짖고 흐느끼며 다른 이들에게 들릴 정도(통성기도를 뜻합니다)로 고뇌한다.

 

그러나 언제나 거기에만 머물다 마는 것이 아니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어찌나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성령의 권능을 어찌나 강하게 느꼈던지 기절하여 땅바닥에 쓰러질 정도였다. 때로는 경련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어떤 사람들은 무의식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고, 일종의 실신 상태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러 시간 동안 그와 같은 상태로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32)


이처럼 영혼의 고뇌는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어떤 사람은 오랜 고뇌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둘째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를 이기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사건은 사람들이 산출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신앙을 회복시키는 회개의 차원은 인간이 산출할 수 없고 또 산출했었던 적도 없다.33)

 

회개는 자신의 죄를 너무 날카롭게 느낀 나머지 자신의 육체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고뇌를 한다. 육체적인 어떤 현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의 죄됨을 인식한 나머지 육신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나타나는 현상이 발생한다.


회개를 가지고 하나님이 나를 가르치실 때, 용서도 함께 가르치신 것을 간증하고자 한다. 나를 아주 많이 미워하는 목사님이 있었다. 그는 나의 신학교 3년 선배이다. 특수목회를 하다가 대형교회 담임목사가 되어서, 그 교회로 부임하면서 대형교회 사역 경험이 있는 나를 부사역자로 함께 청빙해 한 교회에 같이 부임하였다. 담임목사가 특수목회 경험에서 일반목회로 전환되는데,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그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전임 목사와 지금 새로 부임한 목사를 비교하는, 기존에 있었던 십여 명의 사역자들이었다. 1년만에 기존의 모든 사역자를 사임시키면서 나도 함께 사임시켰다. 목사로서 다른 사역지를 알아볼 시간조차 주지 않았고 1개월 안에 모든 사역자들을 잘랐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내가 선교사로 모든 훈련을 받고 선교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교단 선교부를 찾아가서 나를 교단 선교부에서 내보내지 않으면 모든 선교헌금을 중단하겠다고 협박하였다. 서류상으로나 인성검사와 심리검사와, 선교 훈련원의 평가에서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선교후원금이 빵빵한 교단 선교부를 쫓겨 나오게 되었다. 그 목사님은 자신의 부족함을 나의 탓으로 돌리는 것 같았다. 나는 담임 목사를 끝까지 돕고 그의 편에 서서 사역을 하였지만, 나에게 돌아온 것은 배신이었다.

 

나는 그렇게 다른 교회에서 사역할 곳을 찾을 시간조차 받지 못하고 교회를 쫓겨 나와서, 아내가 학원에서 일을 시작하며 경제를 책임짐으로 나는 집에서 오랫동안 아픈 마음의 상처들을 어루만져야만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에게 그 목사님에게 찾아가서 내가 미워하였던 나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라는 마음을 주셨다. 그 전까지 그 목사님이 나에게 찾아와서 사죄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의 말씀이 내 가슴에 박혀서, 도저히 항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내가 목사님께 서운하였던 나의 마음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였다. 그 목사님은 기분이 좋아서 이런저런 말들을 하였는데, 하마터면 내가 그 자리에서 화를 낼 뻔할 내용들이었다. 그래도 꾹 참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나의 마음에 기쁨과 함께 아직도 도사리고 있는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렇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주님을 찾고 있는데, 그 교회의 설교 단상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을 보았다. 나에게는 이런 현상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나는 다시는 그 목사님과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다음날 그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교지로 떠나기 전에 한번 들르라면서 시간과 날짜를 알려주었다. 이것은 내가 마음 속에 전정으로 그 목사님을 용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시 용서를 구하라는 메시지로 해석하였다.

 

나는 목사님을 만나서 다시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였다. 그리고 설교 단상에서 그동안 그 교회에서 이유도 모르고 교회를 나오게 되어서 교회를 미워했던 저의 죄를 성도들에게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였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참으로 큰 해방감과 행복이 밀려들어왔다. 정말 오랫동안 저의 경제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그리고 사역에까지 상처를 준 사람을 주님처럼 용서한 것에 대하여, 대단히 흥분하고 즐거워하였다. 내가 그렇게 용서를 구하였다고 그 목사님이 나의 선교사역을 위하여 선교 후원자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끝났다.

 

그렇게 선교지에 가서 생활하면서 다시 그 목사님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두 번이나 찾아가서 나의 서운했던 마음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99%는 용서하였는지는 모르지만, 1% 용서하지 못하는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서운한 마음의 죄를 가지고 괴로워하였다. 그 당시 하나님은 나에게 완전히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과 함께 나의 야망을 다루셨다.

 

그 목사님은 나를 미워하고 자신의 잘못을 내 탓으로 돌리면서 미워하였다. 하나님은 그 목사님은 자신의 생각을 직접 행동으로 옮겼을 뿐이고, 나는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동일한 마음이 있었는데 다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것을 보게 하였다. 둘 다 똑같은 죄인이되, 하나는 마음 속으로만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행동으로 옮긴 것뿐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둘 다 똑같은 죄인인 것을 보게 하셨다.

나의 마음은 죄에 짓눌려서 죽어지는 경험들을 하였다. 얼마나 죽을 것 같았느냐하면, 밤중에 천정에 쥐나 고양이가 뛰어다니는 소리를 듣고는 쥐와 고양이가 너무나도 부러웠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너무나 후회되었다. 바퀴벌레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선교지에서 모기를 잡아먹는 방의 벽에 붙어있는 도마뱀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만약 내가 존 번연이 경험한 사건을 알지 못했다면, 나는 정신병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99%용서하고 1% 용서하지 못하는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나의 죄와, 나의 야망이 완전히 내려지지 않는 것에 대하여, 어느 날 내가 너무 한심하고 죄질이 무거움을 느껴서, 주섬주섬 옷을 입고 경찰소로 향해가는 나를, 아내의 질문을 통해 지금 내가 어디로 가려하는지 깨닫지 않았다면, 나는 경찰서에 찾아가서 나를 감옥에 가두어 달라고 애원했을 것이다.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갈 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감옥에 가두어 달라고 아우성쳤던 사건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나는 나를 정신병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때때로 나는 하나님이 다루고 있는 용서와 야망 때문에, 기절할 때도 있었다. 또한 병이 나서 병원에서 스트레스성 두드러기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그렇게 1년 반(18개월)을 살았다. 나는 나의 죄 때문에 정말 죽어지는 경험을 하였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붙드는 교리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것이 나의 삶 가운데 실제가 되는 과정이었다. 성경의 진리를 믿음으로 인정하고 고백해도, 나의 마음 속에 죽어지는 경험은 더욱 강해져만 갔다.

 

어느 날 성경을 읽고 있다가 출애굽기 32장에서 33장의 사건을 읽는 가운데, 나는 말씀의 무게 때문에 바닥에 주저 않아 버리고 말았다. 두 번에 걸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질투(열심)를 경험하였다. 하나님이 얼마나 질투(열심)하시는지, 말씀을 통해 체험하면서 내가 그 동안 몸부림쳤던 용서와 야망이 내려놓아졌다. 정말 극적인 경험이었다. 내가 모세시대에 가서 그 시대의 인물들이 되어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사건들을 모두 실제로 체험하는 경험이었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나는 경험하지 못하였던 것인데, 그것으로 하나님의 질투가 나에게 부어졌다. 그렇게나 고대하였던 주님과의 동행하는 삶이 정착되어졌고, 십자가에 의한 삶도 그것을 통해 삶 속에 정확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용서도 야망도 모두 내려놓았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 생활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의 생활 가운데 실제가 되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내가 극히 일부분을 소유함으로 얻게 된 변화였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내가 얼마나 죄인 중에 괴수이며 선한 것이 없되 하나도 없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십자가의 보혈이 삶 가운데 실제가 되는 것을 어디에서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모두 경험을 통해 배우게 되었다.


6. 회개의 목적은 “하나님(예수 그리스도)과 나와의 관계를 빼놓고서는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로 인도하신 사건이 출애굽기에 나타난다. 출애굽기 32장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백성들이 부패한 것을 알리시고 진노하신다. 모세는 회막에서 삼천 명을 죽인다. 이튿날 모세는 하나님께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지 않으시면, 주님이 기록하신 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한다. 모세는 지금 백성들의 죄를 가지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었다. 모세는 지금 지옥에 떨어져 있는 백성들의 참담한 모습을 보고 있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신 것이 바로 지옥인 것을 그는 알았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그 땅으로 가라고 하신다. 그리고 사자를 앞서 보내어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 백성들과 친히 함께 그곳에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출 33:3).

 

회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하지 않는 사실에 당황한다. 그리고 깜짝 놀라고 그토록 슬퍼한다. 더 이상 하나님이 죄인인 나와 함께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통곡하고 삶의 의욕을 모두 상실하고 만다. 그토록 처절하게 고뇌하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너희는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으로 들어가거라. 너희는 고집이 센 백성이기 때문에 동행하다가는 내가 도중에 너희를 없애버릴지도 모르니,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는 않겠다." (공동번역 개정판. 출 33:3)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섬뜩함을 느껴지게 만드는 내용이다. 지금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를 인식한 나머지, 더 이상 죄인 된 자신의 백성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죽음보다 더 큰 절망이고, 바로 지금 지옥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회개는 바로 이것이다. 내가 지금 고개를 돌리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는 자신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심각한 것이, 이 세상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약속한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신 것처럼 성경의 모든 약속을 다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유일한 목적이고 목표가 아닌 너희들을, 약속한 것을 다 주기만 할 뿐, 나는 너희에게 임재하지도 않고 교제하지도 않고 함께 하지도 않겠다고 하신다. 더 이상 너희에게 임재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모세는 인격체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 그분이 자신의 모든 것 되었다. 자신에게 부귀영화와 사람들로부터 얻는 명성을 주지 않아도, 하나님 그분 한 분의 임재를 잃어버리는 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큰 슬픔이었다. 백성들의 슬픔도 마찬가지이었다. 그래서 모든 장신구를 떼어내어 버린다.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모든 부귀영화와 면류관과 자랑들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보다도 더 가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되었다.


 이것이 회개이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개인이 그리고 교회가 번창할 수 있다. 교회가 두드러지게 성공을 거두고 많은 재정과 훌륭한 건물을 가지고 수많은 회심자를 얻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과연 우리가 그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임재를 지금 경험하고 있는가? 진실로 하나님의 임재가 개인과 교회에게 부어져 있다면 이러한 회개의 진수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흔히 보고 경험하는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모세와 백성들의 회개는 가나안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젖과 꿀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관심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만 원한다. 당신이 나의 삶의 모든 것 되시고, 당신만이 나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고 목표라 고백하였다.

 

바울은 성공적인 복음 전도자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 사도였다. 그런데 그는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공동번역 개정판, 빌 3:10-11) 라고 하였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 땅에서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삶의 모든 것 되는 삶을 살았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 더 이상 하나님이 없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 자체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존재 가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바로 회개이다. 아무리 외적으로 번영하고 유익한 성공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시면 내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마 16:27).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뿐만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실존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의 삶 속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실감하게 된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나와 함께 계신 것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더 이상 형식적인 종교의 모습을 버린다. 회개의 목적이며 회개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오! 주님, 주님을 떠나서는 그 어느 것도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만이 유일한 나의 모든 것 되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후회와 회개의 절대적인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후회는 잠깐 지나가는 감정이다. 그러나 회개는 너무나 심오하여 사람의 의지와 세계관과 삶의 목적과 목표에까지 영향을 주는, 삶의 근본적인 변화이다. 이러한 회개는 하나님을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삼겠다는 것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7.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행동을 유발한다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을 실행하기 까지는 결코 회개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어떠한지 실감하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심각한 죄를 깨닫고 그들이 취한 행동은 자신의 몸에 있는 단장품을 떼어내는 것이었다.


이렇듯 가슴 아픈 말씀을 듣고 온 백성은 통곡하였다. 패물로 몸을 단장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전하여라. '너희 고집이 센 백성아,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와 같이 올라가다가는 너희를 멸종시킬 것이다. 그러니 이제 너희는 모든 패물을 몸에서 떼어버려라. 그러면 내가 무엇이든지 알아서 해주리라.'” 호렙 산을 떠난 다음, 이스라엘 백성은 몸에 패물을 두 번 다시 붙이지 않았다.(공동번역개정판. 출 33:4-6)


회개는 우리의 죄악성, 특히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죄악성이 어떠한가를 이처럼 심오하게 인식하고서,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실 만한 것을 힘껏 최선을 다해 행하고 싶어 하는 열망을 찾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죄를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사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단장품을 제하였다. 그렇게 자신들의 변화된 삶을 하나님께 보여주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단장품들이 그들의 함정이 되었다. 그 단장품을 가지고 금송아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두 번 다시 그것을 생각하지 않게 하였다. 자신을 멋지게 꾸밀 수 있는 단장품을 다시는 몸에 걸치지 않는 회개의 변화된 모습을 갖게 되었다.


8. 회개는 자신의 회개에 대한 대가를 생각하게 만들지 않는다


이러한 회개는 세상적으로 큰 대가를 요구한다. 회개는 그 대가를 기꺼이 치를 준비가 된 사람만이 회개할 수 있다.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 자체가 자신의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큰 대가를 지불하였다. 선교지에서 극심한 핍박이 있는 지역을 제외하고 많은 지구상의 나라들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러한 회개의 사건 때문에 일어나는 대가가 초대교회만큼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지 않는다.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한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진정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회개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은, 제3자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진정한 회개를 하면 대가가 두렵지 않는다. 변화된 나 자신이 하나님의 기준 앞에 바로 서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대가가 두렵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대가가 생각나고 두려워진다는 것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이야기이다.

 

누가복음 5장 27 ~ 28에서 레위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려두’는 결단을 스스로 하였다. 한 청년은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네가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눅 18:18-22)고 하셨다. 회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진정으로 회개한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자진하여 고백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을 향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되,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족과 친구를 비롯한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하였다. 회개는 대가가 있다. 회개는 반드시 필요하며(눅 13:3-5), 긴급한 일이고(눅 13:6-9), 자기를 포기해야 하며(눅 14:33), 뒤를 돌아보지 않고(눅 9:62), 자기 부인이 뒤따르는(눅 9:23)일이다.34)

 

그런데 진정한 회개는 대가를 치루는 것이 하나도 겁나지 않고 두렵지 않다. 오히려 그것이 기쁨이고 감사의 표현이다.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이 이제 자신에게 향하시고, 자신에게 환한 미소와 사랑으로 바라보시기 까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리더라도 내게는 하나도 아깝지 않다. 그분만이 유일한 만족을 주기 때문에, 내가 버리고, 멀리하고, 가까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다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불타오른다.


나는 주님이 엄청나게 나의 죄를 다루실 때, 선교사 모임에서 나를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나의 개인 신상을 소개할 수 없었다. 20분 동안 나의 수많은 죄를 고백하고 나의 선함이 하나도 없는 나 자신을 소개하고, 눈물을 머금고 내려온 적이 있었다. 한국의 후원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설교하는 시간에 나의 죄를 고백하고, 눈물을 흘리며 나를 비하하고 정죄한 적도 있었다. 개인적인 만남에서는 더욱 많은 대화의 내용이 나의 선함이 없는 고백들이 주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나의 선함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나의 앞에서도 나의 뒤에서도 나를 손가락질 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나를 더 사랑하고 나를 다루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였다. 내가 자주 나의 죄들을 고백하니 성도들도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고백한 죄에서 자신이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들을 보았고, 하나님 앞에 지옥을 경험하는 것 같아 보였다. 내가 한 행동들은 일반적이지 않는 독특한 행동들이었지만, 하나님이 부흥 때마다 일으킨 행동의 유형이었다. 결과는 예상 밖으로 놀라운 결과가 일어났다. 대가를 생각하였다면 절대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9. 역대하 7:14


회개에 대한 주옥같은 성경구절이 하나 더 있다. 역대하 7:14절이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나의 백성이 스스로 겸손해져서, 기도하며 나를 찾고, 악한 길에서 떠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며, 그 땅을 다시 번영시켜 주겠다.”(새번역, 대하7:14)


본문이 회개에 대한 차례를 설명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회개에 대한 바람직한 모습을 설명하였다. 회개는 스스로 겸비(겸손)하는 것, 기도하는 것, 나를 찾는 것, 그리고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 네 가지를 포함해야 한다.


a. 스스로 겸비하는 것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겸비 혹은 겸손은 다른 번역본에서는 ‘스스로 낮춘다.’ 또는 ‘머리를 숙인다.’라는 말로 번역하였다. 이 말은 남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나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는 것이나 자신에 대해 늘 비하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유교 문화 가운데 있는 우리나라 전통적인 겸손의 의미이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겸손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첫째, 나의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올려드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칼빈은 다른 마음을 전혀 품지 않는 것 이라 하였다. 둘째, 같은 의미이지만 실제적인 표현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하게 동의하고, 그 말씀 앞에 엎드리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심각한 것은 명백한 죄를 짓고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대면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을 정당화시키기까지 한다. 여러 가지 핑계들을 대기에 바쁘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적당한 선에서 넘어간다. 자기들의 죄를 직면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죄를 심각하게 다루는 메시지를 원치 않는다. 자기들이 듣기 좋아하는 메시지만을 듣는다.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서는 절대 회개가 일어날 수 없다. 성경의 인물들과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사용하신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엎드렸다. 그리고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대면하고 회개하며 나아갔다.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기준만이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기준이다. 그러기에 정직하게 말씀을 대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말씀 앞에 정직하게 대면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기준과 그 기준 앞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옷을 찢으며 하나님 말씀 앞에 정직하게 동의하고 엎드리는 것이다.


b. 기도하는 것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비춰주신 그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c. 나(하나님)를 찾는 것


하나님의 임재(Presence of God)란 신구약 성경에서는 ‘그의 얼굴’, ‘영광’, ‘장막’ 등과 같은 개념들과 ‘하나님 앞에’ (문자적으로는 ‘그의 면전’, ‘그의 얼굴에 대하여’), ‘그 가운데’, ‘그와 함께’ 등의 전치사적인 표현들로 용어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35)

 

히브리어에서는 인격, 성품, 속성을 뜻하는 의미의 단어를 ‘얼굴’이라는 단어와 ‘이름’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였다. “나를 찾는다.”는 의미와 성경에서 “얼굴을 구한다.”는 표현은 같은 의미인데,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성품과 속성 등과 같이 살아계신 하나님 자체를 알기 위한다는 의미로 ‘임재’를 뜻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과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알아 가는 것을 말한다. 부부가 서로 안다고 하는 것 같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 한 분만이 유일한 삶의 목적인 삶으로의 전환을 이야기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직접 자신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d.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은 그동안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을 대체하였던 모든 우상을 철저하게 버리는 것이다. 물질주의, 돈을 사랑하고 중시하는 것, 형식적인 예배, 자기 자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의지하는 것, 전통적인 신앙, 성경 지식을 전달하고 신앙의 본질이 없는 성경공부와 같은 모든 것을 철저하게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를 의지하기보다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교회를 세우려고 했던 모든 것,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추구하기보다 화려하고 감동적인 분위기를 만들려고 했던 모든 것. 그리고 소위 교회 성장을 위해 행하였던 모든 그릇된 마음 자세와 행동,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보다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 사람들을 대할 때 진정으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 교회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모든 노력, 하나님께서 교회의 필요를 채워 주시도록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다리기보다 사람들을 교묘하게 조정하여 헌금하게 하는 것,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 그리고 직분을 이용하여 봉사시키시고 예배 출석시키기 위해 직분을 남발한 것,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일꾼을 분별하여 세우려고 힘쓰기보다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을 일꾼으로 세우는 것, 직분을 섬기는 직무로 이해하기보다 계급적인 신분으로 이해한 것, 하나님의 직분을 세상의 사업을 위해 이용한 것 등 이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버리고, 그러한 죄악들로부터 돌이키는 것이다. 회개는 자신과 교회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포함한다. 가치관, 삶의 목표와 목적과 형태, 사역에 대한 이해와 태도, 예배에 대한 이해와 자세와 형태 등 모든 면에서 인위적인 방법론을 버리고 하나님의 기준 앞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G.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은 단계적으로 신앙의 성숙함으로 보아지기도 하지만, 단번에 보는 것이 더 좋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경건한 성도라면 자신의 그러한 모습을 보기를 원한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은, 단번에 보이기도 하지만, 신앙의 성숙함으로 통하여 점점 확실하게 보여 질 수 있다. 오랜 다루심의 기간이 필요하며, 지극히 나이 들어서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된다.


a. 바울이 점진적으로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은 아니다


잘못된 가르침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울에 관한 모든 성경의 내용들을 추적하면서, 바울의 인생의 여정에 따라 나오는 바울이 자신을 묘사한 내용을 근거로 설명한다.

 

바울은 처음에는 자신이 여러 사도 중의 한 사람이라 하였다. 그리고 차츰 신앙이 성숙하자 사도 중에 맨 마중이라 자신을 겸허하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신앙이  성숙하면서 자신은 모태에서 10달도 못 채우고 나온 사람이라 소개할 뿐만 아니라, 선한 것이 없되 하나도 없는 자신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신앙이 더욱 성숙해지자 자신은 죄인 중에 괴수임을 보았다고 고백하였다.

 

이것은 바울의 회심 이후 다루심의 기간을 지난 뒤, 안디옥에서 사역을 시작하기부터 순교하기 전까지 수십 년 동안의 삶 가운데, 바울이 쓴 글을 중심으로 발견해낸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신앙이 성숙해감을 통해 점차적으로 자신의 전적인 타락을 발견해나가는 성숙의 과정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성경의 파편들을 정확하게 뽑아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논리(이론)이다.

 

이것이 맞느냐 틀리냐를 성경에서 찾는 것은 어렵다. 성경에서 이것을 입증할만한 한 개인의 신앙 성숙 여정이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 가운데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였느냐를 찾아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은 부흥 때마다 사용하신 사람들과 부흥 때 하나님께 반응하고 회개의 자리로 나왔던 사람들은 단번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옥을 경험하였다. 단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 부흥을 주도하였던 조나단 에드워드는 그가 죽기 직전에 자신이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보지 않았다. 그는 부흥이 시작하기 전에 죄로 인한 지옥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로,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보도록 청중들에게 설교하였다. 찰스 피니, 무디 등 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 말기에 죄인 중에 괴수를 본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람들 모두가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회개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고, 부흥이 시작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부흥 시대 때 쓰임 받은 인물들은, 신앙의 성숙함을 통하여 죄인 중에 괴수인 자신을 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심으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부흥을 통해 하나님이 회복하시고자 하시는 신앙의 모습으로 회복하실 때, 단번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셔 하나님 앞에 얼마나 자신이 죄인인지 보게 하셨다.

 

프란시스의 전기를 읽어보면, 하나님이 그를 만지셨을 때 그는 지옥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전 인생 가운데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죽을 때까지 확인하며 살았다. 그것이 더욱 십자가를 붙들고 의지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커져 갔다.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의 삶을 보면, 그들은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보았고, 그것에서부터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신앙의 성숙을 통해 죽을 때까지 전적인 타락을 점진적으로 본 것이 아니다. 평생 그들은 그것을 확인하고 십자가를 붙잡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임을 고백하며 살았다.

 

미국의 대각성 운동을 주도한 죠나단 에드워드는, 그가 첫 번째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였고, 또 두 번째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할 때, 그는 회개의 진수를 깨달았고 직접 체험하였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점진적으로 죽을 때까지 더 심오하게 자신의 처지를 확실하게 알아간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죽을 때까지 확인하고 살았다.

 

부흥 때마다 변화된 수많은 역사 속의 성도들이 있다.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이며,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본 이후, 죽을 때까지 그것을 확인하고 살았다. 자신의 상태가 너무나 심각하였기에 십자가가 삶의 실제가 되었다.


b. 점진적으로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보는 것보다, 단번에 보는 것이 좋다


우리의 신앙의 역사는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점진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단번에 보는 것이 나는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의 모습을 단번에 보고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보게 되면, 십자가가 더욱 크게 보인다. 그 은혜와 사랑에 더욱 깊은 체험과 경험을 더 크게 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반론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부흥은 ‘하나님의 특별한 때’이기 때문에, 단번에 자기 자신의 처지를 인식할 수 있었지, 부흥의 때가 아닐 때는 신앙이 성숙되어 감을 통하여 자신의 처지를 인식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부흥의 때이든 부흥의 때가 아니든,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 서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이지, 어떤 특별한 때에만 나타나는 신앙의 현상이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는 분이 아니다. 부흥의 때이든 부흥의 때가 아니든, 하나님의 기준에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회개의 길로 가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러한 일이 부흥의 때가 지나고 수십 년 동안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 시대에 적합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각 시대마다 그 시대에 적절하게 설명되어지는 하나님의 기준과 신앙의 본질 혹은 핵심이 선포되었다. 칼빈이 선포한 말씀을 가지고 우리 시대에 아무리 선포해도 아무런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그것을 뒷받침하셔야 하지만, 칼빈 시대는 그 말씀이 가장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조나단 에드워드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시대에 적합한 말씀들이었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보게 하시는 것은 주님의 주권에 속한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할 수 있지만, 실제가 되는 것은 어떤 법칙도 없고 어떠한 방법론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전적인 주님의 주권이다. 인간을 너무나 잘 알고 사랑하시고 자신에게 이끄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로 인간을 인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질투)이다.

 

나는 지극히 나이가 들고 신앙이 성숙하여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보는 것보다, 단번에 하나님의 인도로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을 소망한다. 내 힘으로 가능하지 않지만, 주님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분이시다.


H. 회개는 언제까지 해야 하나


어떤 사람들은 회개에 대하여 언제까지 회개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나의 죄 때문에 죽어지는 경험을 어느 때까지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우리가 주님을 닮을 때까지 회개해야 한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일 것 같다.

 

회개는 하나님이 시작하신다.36) 자신이 회개하려고 해도 성경적인 회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반응하지 않으면 또 성경적인 회개로 인도되지 않는다.37) 자신이 성경적인 회개를 하겠다면, 자신의 힘으로 회개 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38)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우리가 반응함으로 함께 이루어가는 합작품이다. 이러한 회개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해산의 고통을 치르시면 얻어낸 열매이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견디신 고통은 이 세상에서 아이를 낳은 그 어떤 어머니의 고통보다 더 크다.39)

 

죠나단 에드워드는 회개는 지속적이고 영속적인 변화로 이끄는데 성숙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데, 언제나 진정한 회개는 어떤 사람이든지 성숙을 향하도록 방향을 정해준다고 하였다.40) 즉, 회개는 시작일 뿐이며, 그 열매는 한 사람으로 하여금 성숙의 길로 나아가게 방향을 정해주는 것이다.


I. 성경적인 회개는 잃어 버릴 수 있다


한번 성경적인 회개의 길로 들어서서 수많은 하나님의 다루심 가운데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회개하는 모습을 잃어 버릴 수 있다.

 

자신의 연약한 병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원인은 하나님을 찾지 않아서이다. 주님의 사역과 일에 너무 바빠서 주님 그분을 찾지 않고 구하지 않는다. 자신의 주변에 일어나는 분주함 때문에 자신이 주님을 잊어버린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어느 날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돌아서야 되는데, 자신 속에 있는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찾고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하나님이 자신 속에서 역사하지 않는다.

 

사람은 그냥 놔두면 하나님을 떠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은 신앙을 버렸다는 말이 아니다. 여전히 신앙 가운데 있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영적인 자극과 주님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J. 회개와 믿음에 대하여


칼빈의 구원론에서는 회개가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주신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칼빈에 의하면 믿음 후에 회개가 따라온다고 믿는다. 회개가 이전의 마음을 벗어버리고 새 마음을 입는 것, 마음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져서 삶이 참되게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회개만을 언급한 적도 있고, 믿음만을 언급한 적이 있지만, 회개와 믿음은 같은 뜻을 갖는다. 즉 불신으로부터 돌이켜야만 믿는 것이다. 돌이키지 않고 믿을 수가 없으며, 돌이켰는데 믿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41)은 믿음이 먼저 일어난다고 말했지만, 박형룡 박사42)와 웨슬레43)는 회개가 먼저 일어난다고 말하였으며, 크리소스톰44)은 믿음과 회개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하였다.

 

나는 성경이 명확하게 말하고자 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분명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입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회개의 진정한 의미와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성경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K. 하나님께 쓰임 받은 인물들은 먼저 자신이 회개하고 회개를 외친 사람들이다


성경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지난 이 천년의 교회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회개를 외쳤다. 청교도 신앙의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며, 당대의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리처드 백스터는 ‘회개했는가’라는 책을 통하여 1600년대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회개의 자리로 인도하였다. 조셉 얼라이언의 ‘돌이켜 회개하라’라는 책은 회개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책이며, 1600년대에 하나님이 쓰셨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또한 고든 스미스의 “온전한 회심 그 7가지 얼굴”은 회개에 대한 신학적인 깊이뿐만 아니라 회개의 이론적인 기초를 만들었다. 이들 책은 회개에 대해서 강력하게 외쳤던 기독교 고전이다.

 

구세군의 창설자인 윌리암 부스는 1912년 죽음 직전에 다음 세대 기독교의 가장 큰 위기는 “회개 없는 죄 용서, 거듭남 없는 구원, 성령 없는 교회, 지옥 없는 천국”을 이야기 하였다.

 

대각성 운동을 일으켰던 조지 휘트필드. 그는 그의 설교에서 언제나 심판에 대해서 지옥에 대해서 경고하였다. 개신교 최고의 설교가인 스펄젼이 자신의 모델로 삼고 닮기를 원했던 인물이기도 한 그는, 죄로부터 돌이키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한다고 외쳤다. 그는 그렇게 순회 설교를 하다, 그가 늘 고대하였던 하나님을 위해 닳아서 없어지고자 하였던 그의 소망처럼 죽었다.

 

미국의 초기 청교도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영향을 끼쳤던 사람 중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사람이 있다. 미국의 대부흥이 오기 전 그가 한 설교 본문 전체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는 설교 내용을 모두 종이에 가지런히 쓴 후, 단상에 올라가서 설교 내용을 읽은 방식으로 설교한 사람이다. 미국이 낳은 개신교 최고의 설자였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놓여있는 죄인들”이라는 그 설교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 말미암아,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의자를 붙잡고 있기도 하였고, 어떤 사람은 바닥에 쓰러져 지옥을 경험하였고 몸서리치는 자신의 죄를 경험하였다. 그렇게 미국의 부흥은 그 설교를 통해 시작되었다.

 

2차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던 찰스 피니는, 그의 모든 설교에서 부흥에 대해서 얘기하였다. 부흥은 바로 죄와 회개에 대해서 새롭게 깨달을 때만 가능하고 하였다. 죄에 대해서 새롭게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 안에 부흥이 일어난다고 외쳤다.

 

개신교 최고의 설교가 찰스 스펄전은, “진리는 귀에 거슬리고 회개를 촉구하는 말은 가슴을 찌른다. 그러므로 그런 말을 참지 못하고 경청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결코 훌륭한 성도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귀를 즐겁게 해주는 설교자가 필요하지 않다. 대신 애통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죄를 회개하도록 돕는 사람이 필요하다.”45) 고 말하였다.

 

지금까지 소개한 이 사람들은 한 때 시대를 변화시켰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모두가 죄를 드러내고 회개를 외쳤다. 자신들이 경험한 회개가 너무나도 혹독하였고, 하나님 앞에 멸망 받을만한 것이었기에 선명하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였고, 또한 그렇게 부흥(회복)이 시작되었다.

 

진실로 회개한 자가 회개를 외치면, 그 외침 속에 자신이 그 죄 가운데 속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랑이 있고, 실제적인 삶의 행동 양식이 있다. 전체적으로 정죄의 분위기와 성도들을 치는 설교가 아닌, 사랑으로 변화를 촉구하는 메시지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죄를 지적하고 죄를 드러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수많은 죄악들을 찾아낼 수 있고, 자신이 먼저 그것에 대하여 흥분할 수 있다. 그리고 남을 정죄할 수 있다. 신랄하게 비판하며 자신이 선지자인줄 생각한다. 이러한 삶에는 하나님이 뒷받침하지 않는다. 약간의 사람들로부터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을 수 있다. 또 많은 사람을 후회하게 만들 수 있다. 또 많은 사람들을 울게 만들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인 삶의 변화가 없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주여, 나를 떠나시옵소서. 나는 주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주님같이 거룩하신 분을 나 같은 죄인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그런 회개가,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기를 소망한다.


L.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까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회개하고 싶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의 본성은 멸망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고 심판받아야 한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우리를 사탄은 계속해서 유혹한다.

 

한국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억하는 어느 가수가 있다. 그는 회개하지 않았고 주님을 인격적으로도 만나지 못한 상태로 기독교 문화권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하였다. 이것을 안 어느 목사님이 그 가수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였지만, 그는 거부하였다. 그는 신앙을 가지지 않는 이유를 정직하게 대답하였다. “나는 죄를 짓고 싶습니다. 내가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것인데, 나는 죄를 짓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나는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사탄은 세상의 견고한 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갈라놓으려 한다. 이러한 사탄의 유혹은 인간의 욕심에 이끌리기 때문에 사탄이 성공하는 것이다(약 1:13-15). 이러한 유혹에 단호히 뿌리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회개는 가장 좋은 전도 메시지다. 자신의 선함이 없음을 고백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 그리고 죄 사함과 승리의 간증은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가장 강력한 전도 방법이었다. 이렇게 전도된 사람은 다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공동체에 속하게 되고 계속 공동체에서 고백하는 하나님의 기준 앞에 선함이 없는 자신들을 고백하며 신앙이 성숙하게 된다. 이러한 회개에 대한 고백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들의 영적 성숙을 돕고 자극한다. 주님이 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었다.

우리 시대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행 2:37)하며 통곡하는 모습을 찾아 보기가 어렵다. 성경은“회개하지 않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반드시 임한다.”(롬 2:5)고 하였다.


지금까지 내가 회개에 대해 쓴 글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생소한 회개의 실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지금까지 현대의 문제점을 가지고 회개를 다룬 글들이 조금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제는 인기가 없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것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자신의 삶 가운데 실제가 되지 않아서 고민했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이런 회개의 체험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나가다 보니 잃어버린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이런 경험을 하고 있지만, 말로 옮기는 것이 어려웠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회개가 우리 삶 가운데 실제가 되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우리의 중요한 질문일 것이다. 후회하지 않고 우리가 진정한 회개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나를 다루실 때, 제일 먼저 내가 믿는 신앙을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전환시키셨다. 내가 예수님을 처음 인격적으로 만나고 난 후, 매일 십자가의 예수님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베개의 두면을 다 적시고, 다른 베개로 바꾸기 전까지는 잠을 잘 수 없는 나날을 보냈다. 신학대학에 들어가서 어느 교수님의 세대주의 신학 강의를 듣고, 더 이상 예수님 때문에 눈물짓는 삶이 무너지고, 교만이 마음 속에 자리 잡는 것을 경험하였다. 세대주의 신학의 지식은 너무나 거세고 감정적으로 메마르게 하여,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에서 벗어나도록 하였다. 가슴은 차가와졌고 지식은 풍성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나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신 첫 번째가 이러한 신학적 전제를 버리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들을 보여주시기 시작하였다. 그 기준 앞에 나는 지옥을 경험하게 되었다. 다시 나의 인생은 하나님 그분이 유일한 목적이 되는 삶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전에도 하나님이 나의 유일한 전부라고 고백하고 생각하였지만,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으로의 전환 이후 완전히 다른 차원의 하나님이 유일한 목적이 되는 신앙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처음 나를 회개케 하시고 다루시기 시작하실 때, 약 한 달 동안 매일 울었다. 자다가도 울고 아침에 일어나면 눈물자국으로 베개를 적시었다. 화장실에서도 울었고, 밥을 먹다가도 울어서, 반찬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인간의 눈물이 그렇게 많이 흘릴 수 있는지,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내가 하나님을 떠났다는 사실 때문에 그렇게 울었다. 그렇게 하나님이 나의 인생 가운데 깊이 개입하셔서 시작하셨다.

회개는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우리의 반응을 통해 함께 이루어 가는 것이다. 시작은 그분의 주권에 속하고, 우리를 다루실 때 최선의 모습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다루신다. 역사적으로 부흥 때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회복하시려는 신앙으로 회복하는데,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이러한 회개의 역사였다.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본질을 시작하였는지 하지 못 하였는지는, 회개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M.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다”고 하신 하나님의 표현들


나는 회개와 함께, 하나님이 나를 깊이 다루셨던 말씀을 좀 더 나누고자 한다. 하나님의 기준이 보여 지며, 인격체이신 하나님 앞에 몸서리 쳤던 말씀들이다. 주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다고 하신 하나님의 신인동형적인 표현들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홀히 여겼다(멸시한다, $a'n:)”, “업신여기다(hz:B;)”,“멀리하였다(등을 돌리다. 돌아섰다, qj'r;)”, 떠났다(hl'G:), “저버렸다( yr'j}a'me bv;AyKi)”, “부정하다(더러워졌다, ll'j;)”, 내버려두다(포기하다, paradivdwmi)  라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진 것을 말씀하셨다. 이러한 표현법을 신학적으로 ‘신인동형 동성적인 표현’이라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을, 인간이 강렬하게 느끼고 알도록 말씀하신 것이다.


1. 하나님을 완전히 배신한 것들


하나님을 떠났다고 하였을 때, 반역,46) 다른 신을 섬기는 것,47)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48)을 향하여 하나님은 “멸시하였다”, “등을 돌렸다”, “업신여겼다”, “떠나갔다”라고 말씀하셨다.


2.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지만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떠났다’는 표현을, 하나님을 반역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의 더 많은 부분은 하나님을 여전히 섬기면서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을, 하나님을 완전히 배신한 것과 동일하게 보며 ‘떠났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기준을 바라보시는 방식 때문에 마음이 녹아지고 두려움으로 가득찼다. 구원에 있어서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기준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에 있어서는 십자가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이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나면, 십자가 복음에 거할 지라도 하나님은 불신자와 똑같이 취급하신다. 나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갖는 임재의 단절로 받아들인다. 금송아지를 부어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을 주겠지만, 하나님은 더 이상 백성들과 임재하지 않겠다는 말과 동일하게 여겨진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임재의 단절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출 33:1-4).

 

나는 내가 성경을 잘못 보았는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성경을 다시 살펴보아도, 나는 이렇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방식에 마땅한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였다.


a. 신앙이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지만, 말씀(율법)을 지키지 않는다. 명목상 종교인으로 남아 있는 것


하나님은 “하나님의 율법을 업신여겼다.”,49) “하나님의 율법을 멸시하였다.”50)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 같이,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사 5:24)


현대를 사는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고, “성령의 법”이 우리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의”가 우리가 가운데 기준이 된 삶을 살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룩을 원하신다. 깨끗하고 정결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성령의 법에 의해 사는 삶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복음서 일부분에서,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자신의 삶 가운데 실천하고 살아야 할지 말씀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어떤 사람이 “어떻게 우리가 산상수훈의 말씀처럼 살 수 있습니까? 이것이 과연 가능합니까?”라고 질문한 적이 있다. 가능하기에 주님은 그것을 요구하셨다. 나는 이러한 질문 자체에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 수 없는 좌절감이 들어있는 것을 보았다. 불가능한 일을 주님은 다듬으시고 회개케 하시어 가능케 인도하신다. 우리의 노력으로 절대 불가능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자신의 모든 것 되면, 예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고 자신에게로 우리를 이끄신다.


b. 하나님이 명령한 것과 다른 예배를 드리는 것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있고,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과 다른 예배를 드린 것에, “등을 돌렸다”고 표현하였다(수 22:18, 22:23). 또한 엘리의 두 아들은 하나님을 배교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엘리의 두 아들이 다른 불을 가지고 예배드린 것을, 하나님이 “하나님을 멸시하였다”고 하였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삼상 2:17)


한국의 가장 큰 몇 개 교단은 주일 낮 예배 때, 예배 주보가 없고 찬송가를 부르지 않고, 주일 낮 예배 때 드럼과 전자악기를 사용하고, 순서도 일정하지 않게 드린다고 이단으로 규정한적 있다. 다른 예배를 드렸다는 자신들의 생각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면서 구약을 들먹이고, 신약의 몇 가지 성경구절을 들먹이는데, 구약의 제사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으로 전환 되었다. 오직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 그분과의 만남이 예배의 본질이다.

 

오늘날의 예배의 형식은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오직 하나님 그분과의 만남과 임재가 예배의 본질이다. 지금 현재 그렇게 이단으로 규정한 대형교단 소속 대형교회들 주일 낮 예배가 찬양과 경배스타일로 변하였다. 젊은이들이 많은 젊은 교회들일수록 과거 이단으로 정죄하였던 그 찬양과 경배의 예배 모습으로 변하였다.

 

오늘날 예배가 경건하게 드려야 된다면서 예배 순서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 있고, 성령에 민감해야 된다면서 유동적인 경배 찬양의 예배 순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 성경적이라 생각하지만, 성경은 순서를 말한 적이 없다. 자신의 교회가 신령한 예배를 위해 선택한 예배 방법이라 말해야 맞는 말이다.

 

예수님이 이슬람의 예배 형식으로 예배드린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유대교와 이슬람 예배 형태는 형식면에서 거의 일치한다. 한번 생각해보라. 이슬람의 예배 형식과 같이,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싫어하는 형식을 통해 예수님은 영광의 임재 가운데 있었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셨다. 베드로가 성전에서 이러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전하자 5천명이 회개하고 3천명이 회개하였고,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이러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전하였을 때, 로마 도시에 교회들이 생겨났다. 초대교회 유대인은 모두 이러한 예배를 드렸고, 교부시대까지도 동방정교회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예배를 드렸다. 무하마드는 이러한 예배 형식을 유대교 아니면 기독교인에게 배운 것이다.

 

예배의 본질은 형식에 있기보다, 신앙의 본질에 선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보수적일수록 성경에서 예배 기준을 잡기보다, 전통을 더 숭배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c. 하나님이 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자신이 골라서 순종하고 싶은 것만 부분적으로 순종한 것


사울왕은 지금까지 그래도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하나님이 “너는 이제 가서 아말렉을 쳐라. 그들에게 딸린 것은 모두 전멸시켜라. 사정을 보아 주어서는 안 된다.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젖먹이, 소 떼와 양 떼, 낙타와 나귀 등 무엇이든 가릴 것 없이 죽여라.”(새번역, 삼사 15:3) 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사울과 그의 군대는, 아각뿐만 아니라, 양 떼와 소 떼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것들과 가장 기름진 짐승들과 어린 양들과 좋은 것들은, 무엇이든지 모두 아깝게 여겨 진멸하지 않고, 다만 쓸모없고 값없는 것들만 골라서 진멸하였다.”(새번역, 삼사 15:9)

 

사울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행하였지만, 완전히 이행한 것이 아니었다. 사울은 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사울왕 시대에는 전쟁에서 죽은 병사에 대한 처우가 없었다. 또 상비군이 없이 그 때 그 때 12지파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훈련하여 전쟁터로 나아갔는데, 현실적으로 병참이나 보급의 문제 그리고 생명을 걸고 싸운 군사들의 사기를 위해서 노략한 물자를 가지고 그것을 충당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사울왕이 행한 것은 합당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두 죽이라 하였다.

 

사울왕은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합리화하여,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였다. 자신이 따르고 싶은 것은 순종하고, 따르기 싫은 것은 불순종한 것이다. 하나님은 부분적인 순종을 불순종으로 규정하신다.

 

하나님은 이 상황에서 사울이 나에게 등을 돌렸다라고 하신다.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이 후회된다. 그가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사무엘은 괴로운 마음으로 밤새도록 주님께 부르짖었다.”(새번역, 삼상 15:11)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이 순종하고 싶은 것만 순종하고, 부분적으로 일부분만 순종한 것을,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았다고 판단하시며, 나에게 등을 돌렸다고 선언하신다. 부분적인 순종은 불순종이다. 처음부터 순종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우리 가운데 시사하는 바는 아주 크다. 오늘날 교회는 부분적인 순종을 한 것을 가지고 주님께 순종하였다고 제 나름대로 안도의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한다. 마음에 거리낌이 있기 때문에 완전히 불순종하기 그러니까 조금만 순종하는 모습을 하나님께 보여주며, 자신의 의를 가지려고 한다.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는 모두 불순종의 모습이다.


d.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 = 믿음이 없는 것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가기 전에 그들은 하나님께 신앙의 다루심의 기간을 가졌다. 그 기간 중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진정한 친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셨다. 그리고 하나님 그분이 인생의 모든 것 되고, 유일한 힘이 되고, 삶의 목적과 목표가 되는 것을 원하셨다. 이러한 신앙의 본질 가운데, 하나님을 살아계신 인격체로 인식하고 신뢰하는 것을 “믿음을 가졌다.” 또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라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같은 것을 먹게 됨으로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였다.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계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가 함이라 하라.”(민 11:20.)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지금의 삶을 불평하고 불만해 있는 백성들의 상태를 “ 하나님을 멸시하였다.”고 하였다.

 

백성들을 시험한 하나님의 의도는,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보는 것이었다. 누구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는 경험을 하면, 당연히 하나님을 부르짖고 기도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당연히 그렇게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 지켜보고 계신다. 심지어 3일 동안 물을 먹지 못한다고 생각해 보라. 갓난아이에게 3일 동안 물이 떨어졌다면, 부모라면 어떤 마음을 가지겠는가? 반쯤 미칠 것이다. 백성들의 반응이 이런 반응이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하나님 그분을 신뢰하는지 보시는 것이었다. 언제나 하나님이 지금 출애굽한 백성들을 다루시는 것과 같이 다루시는 분이 아니다. 먼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출애굽기 19장을 통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율법을 통해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는 모든 길을 알리셨다. 이러한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생긴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을 향해 하나님이 백성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관계로 다루고 있다. 이것을 ‘손을 구하는 삶’,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모두 열 번을 시험하였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실패하였다(민 14:22). 하나님은 또 다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민 14:11, 14:23; 시 106:24)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믿음이 없는 것. 즉 살아계신 하나님의 신뢰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을 멸시한다고 하였다. 오늘날 믿음은 교회생활 충실히 하고, 십일조, 헌금, 주일성수, 충성, 봉서 많이 하는 것이 믿음이 좋다고 평가하고 직분을 그렇게 남발하는 시대이다. 바리새인과 과연 다른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우리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기고 자식이, 가족이, 자신의 주변에 불행들과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들이 일어나면,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다른 것을 먼저 신뢰한다. 자신의 학력, 친구, 친족, 자신의 경력, 경험, 자신의 교단과 자신의 교회를 신뢰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더 큰 모습으로 우리를 최선의 모습으로 인도하고 계시다는 신뢰를 가지지 못한다. 사람들에게 말로는 믿음이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온갖 잔머리를 굴리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목회자로부터 성도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다른 것이 없다.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이 없는 모습을 일컬어 하나님을 멸시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믿음은 살아계신 하나님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e. 하나님이 하신 은혜를 잊어버린 것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가르고 애굽의 군대를 무찌르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추위와 더위를 해결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을 것을 끊임없이 공급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다. 그렇게 사랑해주고 애써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마음이 높아져 버렸다. “이스라엘은 부자가 되더니, 반역자가 되었다. 먹을거리가 넉넉해지고, 실컷 먹고 나더니, 자기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기들의 반석이신 구원자를 업신여겼다.”(신 32:15)

 

인간은 조금만 좋아지고 상태가 좋아지면, 과거를 잊고 현실에 만족하게 된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자신이 잘 나서 그런 줄 안다. 자신의 부족함과 자신의 전적인 무능함을 잊어버린다. 이것을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업신여긴 것이라 하였다.


f. 신앙의 본질을 따르지 않는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4) 본문에“만홀히 여긴다”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다른 번역본에는 이것을 “업신여기다”, “멸시한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유는 신앙의 본질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신앙의 본질을 따르지 않는 것을 “등을 돌렸다”라고 하였다(사 50:5; 렘 7:24, 15:6, 32:33; 슥 7:11).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는 것.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것이다. 구약의 신앙의 본질과 신약의 신앙의 본질은 동일하다. 그런데 지금 수많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책을 보면 신앙의 본질이 완전히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약의 언급도 그렇고,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의 관계도 규정짓지 못하고 있다. 신앙의 본질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변한 것이 있다면 이제 하나님 그분을 알고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다. 즉, 임재의 방법이 바뀐 것뿐이다.


g. 하나님이 거룩하다 한 것을 업신여기고 더럽혔다


“너는 내 거룩한 물건들을 업신여겼으며 내 안식일을 더럽혔다.” (겔 22:8)


이것은 예배의 타락을 말하는 것이다. 예배 형식이 틀렸기 때문에 말한 것이 아니다. 예배의 마음이 먼저 부패하고,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허울뿐인 예배이다. 지금 하나님은 그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 주일성수한 것이 중요하고, 십일조 빠뜨리지 않는 것이 중요한 오늘날의 교회와 다를 바가 없다. 아무리 50년 동안 주일성수 하였더라도, 하나님은 인격체 되신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던 것만 기억하신다. 아무리 십일조를 정확하게 빠뜨리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라 생각한 헌금만을 기억하신다. 아무리 봉사를 많이 하고 교회를 위해 수많은 희생을 했더라도, 주님이 자신의 모든 것 되지 않고, 불순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하나님께 얻기 위해 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으신다.


h.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상실하고 다른 것으로 대체한 것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있다.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대체하는 것을 싫어하신다. 얼마나 싫어 하시냐 하면, 애굽에서 건저내신 자신의 백성 약200만 명을 모두 죽이겠다고 하실 정도였다.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었다. 예레미아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로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나무와 돌로 형상화 하였다.


“그들은 나무를 보고 '나의 아버지'라고 하고, 돌을 보고 '나의 어머니'라고 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등을 돌리면서도, 얼굴은 돌리지 않고 있다가, 환난을 당할 때에는 '오셔서, 우리를 구하여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는다.”(렘 2:27)


하나님께 등을 돌렸다는 것은 인격체 되신 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고 한 것은 백성들이 형식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예배와 헌금과 봉사로 일관하였기 때문이다.

 

이 본문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이 본문을 하나님을 나무와 돌로 의인화하여 섬긴 것, 즉 출애굽기 시절 금송아지와 같이 해석할 수도 있다.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든, 모두 인격체이신 하나님 대신, 다른 것으로 대체해버린 신앙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 이것은 우리 시대 심각하다.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대체하는 것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교회 나가는 이유가 자신의 경제적 이유이고, 종교적 자기 욕구를 채우고 싶은 이유이고, 사회 봉사를 통해 자신의 보람을 찾기 위한 이유이고, 정치적인 출세가 목적인 사람이 있다. 그러한 목적으로 교회에 나왔다 하더라도, 목표가 바뀌어야 하는데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교회에 나가는 이유가 사업이 잘 되고, 자식 잘되고, 건강하고, 불투명한 미래의 성공을 위해 기도로 투자하기 위해 나아간다. 이러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은 모든 예배와 헌금과 봉사의 이면에 이러한 마음이 가득하다. 정성을 하나님께 드리면, 자신에게 하나님이 보답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교회는 이러한 신앙을 부축일 때가 많고, 목사들은 그것을 묵인하고 교묘히 이용하기도 한다.

 

자신의 야망이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대체하였다. 교회 성장도 많은 경우 목사의 야망이다.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대체한 우상이다. 목사의 가장 큰 우상이 성도이며 목회이다. 나는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하고 18년 만에 내가 성도와 목회라는 우상을 섬겼던 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하나님을 섬겼다고 생각하였지만, 나는 교리적이고 이성적인 하나님을 이용하여 목회와 성도를 섬기며, 교회 성장이라는 나의 야망의 우상을 섬겼다.

 

우리 시대 가장 가려져서 보지 못하는 우상이 있다. 그것은 이성과 과학이라는 합리주의 사고이다. 인격에 들어가야 할 자리에 이성이 들어가서 하나님을 더 이상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성경은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하나님을 인격적인 분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하나님을 인격체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신약이든 구약이든,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인간적인 관계와 관련된 단어와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다. 합리주의가 자유주의 신학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온건한 합리주의 신학이 있는데, 바로 세대주의이다. 한국 교회는 보수적이면 보수적일수록 온건한 합리주의 신학을 따르고 있다. 하나님을 신학적으로는 인정하지만, 인격적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율법주의와 교리로 대체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본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추구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학적 사고 방식과 신앙적인 사고 방식이 이성과 과학이라는 합리주의에 크고 작게 물들어 있어서, 이러한 인격적인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이다. 우리 시대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가장 큰 “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다. 서구는 물론이고 이것에 물들지 않은 한국 사람이 없다.

 

근본적인 이유로 첫째, 한국이 서구적인 교육 방식으로 변하면서 대부분의 많은 한국 사람들의 사고 체계가 서양화 되면서, 합리주의에 깊이 물들어 버렸다. 이것에 대한 긍정적인 부분은 한국이 많은 분야에 급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 나라의 성장과 부국강국의 원인은 국민성에 있다. 국민성 자체에 서구의 합리주의가 깊게 침투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의 신학교의 교수들이 대부분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아 왔기 때문이다. 미국 자체가 합리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다. 합리적인 사고 방식이, 폭넓은 성경 지식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지만, 온건하게 합리주의가 침투하게 되어, 하나님이 인격체 되신 분으로 인식하는 것을 잃어버리게 하였다. 이러한 신학을 미국에서 공부해온 수많은 한국의 신학교가 온건한 합리주의를 따르게 되었다. 셋째, 한국 사람들의 심성에는 빨리 빨리 무언가를 이루고자하는 국민성이 있다. 하나님을 빨리 아는 방법은 공부해서 지식으로 알아버리기를 원하는 국민성에도 있다. 하나님은 경험을 통해 자신의 인생 가운데 경험을 통해 알아가는 것인데, 한국 사람은 그것을 기다리지 못한다. 그것이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크든 작든, 합리주의 신학에 빠져 있으면, 하나님을 살아계시고 인격체 되신 분이라 하면, 신학적으로 동의하지만, 실제적인 신앙에 있어서 어떻게 실제가 되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자신의 사고 체계가 그것을 거부한다. 신학적으로 성서적으로는 인정하지만, 자신의 사고 체계는 그것을 거부하는 것을 자신이 모른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은 인격체이신 분으로 인식해야한다는 말조차도 모호하게 들린다. 지식적으로는 인정하지만, 그것의 실제가 떠오르지 않는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가장 많은 논문을 쓴 것이 ‘거룩한 감정’과 관련된 것이었다. 자신의 일생 동안 지속적으로 싸움을 벌여 나간 이유가 바로 합리주의 사고 방식과의 싸움이었다. 그런 조나단 에드워드가 그렇게 많은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왜 그렇게 싸움을 하였는지 이해를 못한다. 조나단 에드워드 시대에도 부흥의 가장 큰 적이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합리주의적 사고 체계에 깊이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인격체이신 하나님이 별로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보고서도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지 느끼지 못한다. 합리적인 신학과 사고 방식은 자유주의라고 단정하고 자신은 아니라 생각한다. 자유주의는 명백한 합리주의이지만, 복음주의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것은 바로 온건한 합리주의이다.

 

온건하기 때문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 신학과 신앙에 뿌리 박혀버렸다. 그리고 자신이 그 합리적인 사고 방식에 의해 자신의 신학과 신앙이 변질되고 있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합리적인 사고는 신앙과 신학 이전에, 자신의 사고 체계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이 지금 하나님을 떠나고 또한 떠났는지 모르고 있다. 자신이 지금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있는데, 그것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는지도 인식하지 못한다.

 

나는 예전에 이러한 신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나의 경험을 적은 것이다. 모두 나의 경험이었고 내가 인격체 되신 예수님을 통해 알아가면서, 나의 문제점들을 본 것이다.


I. 인격체 되신 하나님 그분의 성품을 모르는 것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하나님 그분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실제를 통하여 알게 된 하나님의 성품을 모르는 것을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라 하였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그대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과 오래 참으심을 업신여기는 것입니까?”(롬 2:4)


신앙에 있어서 성경공부를 통하여 하나님 그분과 그분의 뜻을 보여주신 것을 발견하는 노력은 중요하다. 성경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의 성경공부 자체가 성경의 넓이와 깊이와 그 배경을 아는 것에 초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교리를 잘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 모두 틀린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지만, 정말 중요한 것을 놓쳤다. 그것은 하나님 그분을 아는 것이, 성경을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인격체 되신 하나님 그분을 잘 아는 것이 아니다. 지식이 인격을 대체한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현제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성경공부 교재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많은 경우 교회에서, 교리 아니면 제자훈련 교재를 가지고 공부만 하는 실정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사무엘은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지식이 아니라 경험된 하나님의 성품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우리 시대 기준이 잘못되었다. 수많은 프로그램을 이수한 것이 신앙을 측정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님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교회에서의 수많은 섬김과 봉사가 신앙을 측정할 수 있는 도구가 되고, 직분을 남발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인격체 되신 하나님 그분을 경험을 통하여 아는 가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가까이 하신다.


j. 하나님이 더 이상 함께 하지 않음


엘리 제사장 시절 언약궤를 빼앗기는 사건을 가지고 하나님이 더 이상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약궤를 빼앗김을 통해 임재가 떠나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이미 임재가 떠나갔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언약궤를 빼앗기도록 방치하였다.


“그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어 주며, "이스라엘에서 영광이 떠났다" 하는 말만을 남겼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데다가, 시아버지도 죽고 남편도 죽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가 하나님의 궤까지 빼앗겼기 때문에, 이스라엘에서 영광이 떠났다고 말했던 것이다.” (새번역, 삼상 4:21-22)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인격체 되신 하나님 그분을 금송아지로 대체한 사건 이후 진노하시는 하나님께 모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의 용서를 구한다. 그러자 하나님은 가나안을 다 줄 테니 자신의 임재는 함께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 소리에 모든 백성은 슬퍼하며 다시는 자신의 몸을 치장하지 않았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고서도,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적 생명이 고갈된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세상의 좋은 것들로 우리를 즐겁게 만들 수 있다.

 

예배 가운데 임재가 없으니 경건함과 정숙함으로 분위기를 만들어 임재 없는 예배 가운데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신령한 느낌을 주려고 애쓴다. 그런 분위기가 임재가 아니다. 그냥 정숙하고 경건한 느낌이다. 임재가 있으면 누구나 그 임재를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것이 임재이다. 찬양과 경배로 예배 때에 찬양을 많이 한다고 임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찬양은 사람의 감정을 흥분시키기도 하고 울게도 만들 수 있다. 그러한 감정이 임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찬양 가운데 임재하시지만, 감정이 임재가 아니다. 그러나 임재와 찬양은 연결되어 있어서, 그리스도의 임재는 찬양으로 인도된다.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의 임재가 떠나가 버리니, 그것을 대체하기 위해 수많은 꼼수들을 찾고, 또 그것이 노하우라고 생각하여 대형교회목회자가 작은 교회목회자들을 가르친다. 임재가 떠나가 버린 오늘날 교회가 다시 회복하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k. 하나님의 황금률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


하나님은 자신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신다 하셨다. 그리고 자신을 멸시하는 자를 경멸하리라 하였다. 이것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변함이 없는 황금률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아무리 하나님을 경멸해도 사랑으로 자신을 감싸주시고 사랑해주시는 분으로 착각하고 산다. 십자가의 사랑을 노래하고 십자가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산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이 유일한 전부가 되는 삶을 살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것에서 멀어지면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우신 기준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멸시하고, 등을 돌리고, 떠나가는 현상을 보시면, 바로 우리를 바로 떠나가신다. 떠나가시고 등을 돌리시고 얼굴을 돌리신 하나님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이유 때문에, 그렇게 슬퍼하고 마음 아픈 과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 회개이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나님을 떠났다고 하실 때, 우리는 때로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기도하면 그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런데도 하나님은 함께 하지 아니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버렸다고 하신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은 두세 사람이 기도하면 저절로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은 그들과 더 이상 함께 하시지 않는다. 두세 사람이 모여 있어도 더 이상 임재하지 않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다고 예수님이 함께 있다고 착각한다. 하나님의 기준을 알아야 한다.


l. 자기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을 향하여 “내어버려 두었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1:28)


많은 사람들이 ‘내버려 두사’의 대상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로 알고 있다. 그런데 로마서는 불신자를 위해 쓰여진 본문이 아니라 로마에 있는 신자들을 위해 쓰여졌다. 본문은 불신자뿐만 아니라, 기존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였다는 것은 복음, 인격체이신 하나님보다, 자기 중심으로 사는 삶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어떻게 해석되든지, 중요한 것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추구하는 신앙의 본질에 서 있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이 내버려 둔다.

더 이상 사랑의 대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잘 되든 못 되든 상관없는 자로 여긴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삶이다. 세상적으로 잘 될 수도 있고 못 될 수도 있다.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끊어진 교회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은 그냥 버려둘 수도 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그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지 않고 자기가 중심이 된 삶의 특징은, 항상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경향이 있다(창 4:3-7). 그리고 자신을 변호하려는 경향이 있다(창 3:12-13). 그리고 자신을 과신(눅 22:33-34)하고 자기 자부심이 강하다. 이러한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해도 자기 위주의 신앙생활을 하고, 자기 위주의 사고방식을 가진다.


m. 바른 것을 가르치지 않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은 “이름이 멸시 당했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나를 떠났다.”, “등을 돌렸다.”, “멸시하였다.”, “더럽다.” 등등의 표현을 사용하시면서, 하나님을 배교한 것뿐만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고는 있지만,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을 통해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표현 가운데 가장 최상급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내(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였다(ymiv] yzE/B).”고 하신 것이다. 말라기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하나님이 가장 분노하고 있는 추잡한 멸시가 등장한다. 심지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우상숭배나 하나님의 배신한 것보다 더 큰 분노를 말씀하셨다.


“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하고 종은 제 주인을 두려워하는 법인데, 내가 너희 아버지라고 해서 너희가 나를 공경하기라도 하였느냐? 내가 너희 주인이라고 해서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기라도 하였느냐?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제사장들아, 너희가 바로 내 이름을 멸시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가 언제 주님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까?' 하고 되묻는다.”(새번역, 말 1:6)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 속성, 본질 그리고 평판, 명성, 영광을 의미한다. 히브리어 자체가 이러한 것을 담을 수 있는 별도의 단어가 없다. 그래서 “이름”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의미가 바로 이 의미이다.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끝내야 한다는 의미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성품, 속성, 본질의 모든 것을 힘입어 기도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에게는 이름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 그 분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하나님 그 분의 모든 것을 담는 이름을 멸시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그냥 멸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극도로 멸시 한 것이다. 성경에서 유래가 없이 가장 강력하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부분이다.

 

말라기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며 율법을 버린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예물을 드리고 하나님을 믿는 시대였다. 그런데 백성들이 하나님이 명하신 방법대로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고, 더러운 빵을 제단에 올리고, 눈이 멀고, 절뚝거리거나 병든 제물을 제단에 바치고, 거짓된 십일조를 드리고, 자신이 하나님께 맹세한 것을 어기고 있었다(말 1:7-14).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배드리고 헌금 드리는 형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마음이 담기지 않은 모든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하나님은 복을 저주로 바꾸어서, 자손을 꾸짖고, “너희 얼굴에 똥칠을 칠해서 똥무더기 위에 버려지게 하겠다.”고 하셨다(말 2:2-3). 그러시면서 하나님은 레위인을 꾸짖는다. 레위인이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기준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백성들을 바로잡아주지 않고 가르치지도 않고 자기 목회에 유리하게 가르쳤다.


“너희는 바른 길에서 떠났고, 많은 사람들에게 율법을 버리고 곁길로 가도록 가르쳤다. 너희는 내가 레위와 맺은 언약을 어겼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그러므로 나도, 너희가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하였다. 너희가 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율법을 편파적으로 적용한 탓이다.”(말 2:8-9)


하나님은 이러한 말씀을 전하는 제사장을 사자(특사, 대사, 전령, &a;l]m)라 말씀하시며 바른길에서 떠났다고 하셨다(말 2:7). 하나님이 수치스럽게 여기신 이유가, 올바른 말씀을 가르쳐야 할 사자인 제사장과 레위인이, 자신은 바른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바른 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사실이다.

 

오늘날의 모습이 바로 이러한 모습인 것 같다. 형식이 본질을 대체하여 형식이 가득한 교회의 모습을 목회자는 이미 알고 있다. 임재가 떠나갔기 때문에 무언가 대체할 것을 찾고 있기 때문에 틀린 것을 알고 있지만, 성도들을 교회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알고 있고, 성도들 가운데서도 일반화 된 것을 이미 알고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은 설교 때나 필요한 단어이지, 삶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거는 행위는 절대 하지 않는다. 또 자기 마음에 확신이 온 것이 있으면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이라며 모든 것을 걸어버린다. 성경에서 합리화할 수 있는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확신을 가진다.

 

기복신앙이 나쁘다 말하지만, 자신이 기복신앙을 부추기며, 가정과 사업장과 자녀와 치유를 위해 기도할 기도제목이 얼마나 많은데, 기도하지 않냐면서 새벽기도와 금요기도 모임에 참석하도록 부추긴다.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니지만, 성도들을 기복신앙으로 인도하고 있는 간접적인 표현인 것을 자신은 알지 못한다. 기도가 자신이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기본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의 수단이 된 기복신앙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을 알아도, 성도들 숫자가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 합리화 한다. 기복신앙을 나쁘다 말하면서 그것을 부축이고 있다. 하나님 그분이 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성도들이 좋아하는 주제들을 설교함으로 성도들이 위로받고 힘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여,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이 되는 설교는 하지 않고, 지금 성도들 등을 긁어주는 설교로 일관한다. 신앙이 타락하면 늘 도덕 설교만 한다. 교회가 타락했느니 세상이 악하다느니 하면서 자신이 분별하는 분별력은 대부분 도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에 대한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른다.

 

말라기 시대와 지금 시대가 다른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시대적 상황만 다르지 하나님이 극도로 수치스럽게 생각하시는 종교 지도자의 모습은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 당하는 것을, “하나님이 똥칠 당했다”(말 2:3)라고 말씀 하셨다. 성경 본문에는 똥칠 당했다는 말이 없지만, 하나님께 드린 예물을 똥이라 하였다. 즉 하나님께 똥을 바친 것이고 하나님은 똥을 받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수치 당하고 계심의 수치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정서와 감정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똥칠 당하고 있다”고 해도 바른 해석일 수 있다. 지금 우리 시대에, 바른 것을 가르치지도 않고, 성도들이 떠나갈까 봐 자신도 바른 것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목사들에게, 하나님은 똥칠 당하고 있다.

 

어느 날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그는 내가 하나님의 기준을 쓰고, 그 앞에 나를 돌아보며 회개하는 내용을 인터넷에 올렸는데, 그 글을 본 것이다.  목사의 치부를 드러내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심판받고 저주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그 말 속에는 목사들만 가지고 있는 비밀이기 때문에 밖으로 발설하지 말라는 의미도 있었다. 예수님이 가장 미워하였던 사람이 누구였는가? 바로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지금 같으면 목사들이다. 예수님도 종교 지도자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악독한 표현들을 써가며 그들의 잘못을 사랑으로 지적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 가장 분노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오늘날의 목사들이다.

 

말라기서에 말씀하고 계시는 극도로 분노하신 하나님이 느껴지고, 예수님이 느끼셨던 바리새인이 바로 나 자신인 것이 보여야, 우리 시대 인격적인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을 똥칠하고 있는 모습이 보여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이러한 표현들이 나를 변화시켰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성경말씀을 통하여 하나씩 알아갈 때마다 죽을 것만 같았다. 인격체 되신 하나님의 이러한 표현들이 가슴에 박혀, 얼굴을 못 들고 한없이 슬퍼하고 애통해 하였다. 하나님은 나를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회개케 하셨고, 지금도 다루시고 계신다.

 


1) 조셉 얼라인, 「돌이켜 회개하라」, 이용복 옮김, (서울:규장) pp. 19-20

2) 조셉 얼라인, op. cit., pp. 20-23.

3) 조셉 얼라인, op. cit., pp. 24-25.

4) 조셉 얼라인, op. cit., pp. 25-26.

5) 찰스 G. 피니, 「구원에 이르는 회개」, 엄성옥 역, 서울:은성출판사, 1991. pp.16-17.

6) 고든 스미스, 「온전한 회심 그 7가지 얼굴」 임종원, (서울: 도서출판 CUP), p. 44.

7) 토저, “신앙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이다”(Faith Is a Joumey, Not a Destination), (The Alliance Weekkly 92), 45호(1975):2. 고든 스미스, op. cit.,에서 재인용.

8) 다음 국어사전, http://dic.daum.net/word/view.do?wordid=kkw000298632&q=%ED%9A%8C%EC%8B%AC (접속시간: 2012.10.23.)

9) 다음 국어사전, http://dic.daum.net/word/view.do?wordid=kkw000298289&q=%ED%9A%8C%EA%B0%9C (접속시간: 2012.10.23.)

10) 고든 스미스, op. cit., pp. 207-208.

11) Francis Brown, The Brown-Driver-Briggs Gevrew and English Lexicon (Peabody, Massachusetts: Hendrickson Publishers, Inc., 2003 reprint), p. 637.

12) 조용현, 구약의 회개 구약의 회개 -슈브(bWv)를 중심으로, ttp://blog.daum.net/jesussheep/469. (접속시간: 2012.10.23.)

13) 존 콜쿤, 「참된 회개」 홍상은 역, (서울:지평서원. 2007). pp. 58-65.

14) Ibid., pp. 41-42.

15) J. Goetzmann, "μετάνοια," The New Interm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Vol, Ⅰ, p. 357.

16) 고든 스미스, op. cit., pp. 201-203.

17) 장성민, 신약의 회개-메타노이아(metanv oia)를 중심으로, ttp://blog.daum.net/jesussheep/469. (접속시간: 2012.10.23.)

18) 마틴 로이드존스. 「부흥」, 서문강 역. 서울:생명의말씀사, 2009. p. 85.

19) 마틴 로이드존스, op. cit., p. pp. 224-227.

20) Ibid.,

21) 고든 스미스, op. cit., pp. 36-40.

22) Ibid.,

23) 서울아산병원, 공황장애(Panic Disorder)에 대한 지식,  http://k.daum.net/qna/item/

view.html?svcorgid=_SDB&sobid=h_dise&itemid=H002289 (2013. 3. 21 검색)

24) 마틴 로이드존스, op. cit., pp. 204-205을 참조.

25) 마틴 로이든존스, op. cit., p. 227.

26) 마틴 로이드존스, op. cit., p. 228.

27) Ibid.,

28) 조나단 에드워즈, 「영적 감정을 분별하라」 김창영 역, 서울:생명의말씀사. 2001.

29) 고든 스미스, op. cit., p. 166-172.

30) Ibid., pp. 60-61.

31) C. Brauer Jerald, Conversion:From Puritan to Revivalism, Joumal of Religion 58. 1978, p. 233.

32) 마틴 로이드존스. op. cit., p. 162.

33) Ibid.,

34) 고든 스미스, op. cit., p. 207.

35) 성서백과대사전편찬위원회, “성서백과대사전”, 12월 (서울:성서교제간행사, 1982), p. 157.

36) 부흥을 경험한 조나단 에드워드와 청교도들은 하나님이 앞서서 일하신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살아갈 때에만 회개가 일어났었다. 모두 경험에서 나온 것이며 성서적으로 증명 가능한 것들이다. 회개는 극적이고 결정적인 순간이라기보다 사람이 분별하는 어떤 것이라 하였다. 회개는 흔히 하나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임재하셔서 일하시는 아주 미묘한 방법을 인식하는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이다. 고든 스미스, op. cit., pp. 164-165. 나는 회개를 경험한 자만이 조나단 에드워드와 청교도들이 회개에 대하여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이것을 경험하였으면 좋겠다.

37) 고든 스미스, op. cit., pp. 187-195.

38) 조셉 얼라인, op. cit., p. 32.

39) Ibid., 34.

40) 고든 스미스, op. cit., p. 161.

41) 장 칼뱅, 또는 존 칼빈(프랑스어: Jean Calvin, 1509년 7월 10일 - 1564년 5월 27일)은 장로교를 창시한 프랑스의 개신교 신학자이자 종교개혁자이다.

42) 박형룡(朴亨龍, 1897년-1978년)은 평안북도 벽동의 출신으로, 장로교 대표적인 보수주의 신학자이자 목사이다. 선천의 신성중학교를 마치고, 평양 숭실대학을 졸업한 뒤 1923년 중국의 금릉대학(金陵大學)과 1926년 미국 뉴저지의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동북신학교 교장, 총회신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신학난제선평, 교의신학(敎義神學)이 있다.

43) 존 웨슬리(Rev.John Wesley, 1703년 ~ 1791년)는 감리교 운동을 창시한 영국 성직자이다. 감리교와 성공회에서는 그의 회심일인 5월 24일을 기념하고 있다.

44)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Ιωάννης ο Χρυσόστομος, 349년경 – 407년)또는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초기 기독교의 교부이자 제37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였다. 뛰어난 설교자였던 그는 초대 교회(고대 교회)의 중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끊임없이 기독교 교리에 대해 설전을 펼쳤다.

45) C.H. 스펄전, “네 주께 굴복하라” 라는 설교의 일부분.

46) 민 16:30; 사 59:13; 렘 48:39; 렘 2:29.

47) 왕상 9:6; 신 31:20.

48) 시 15:4; 잠 1:32.

49) 암 2:4; 사 30:12; 겔 20:16; 느 9:29.

50) 레 26:15, 26:43; 민 15:31; 잠 1:25, 13:13.


 

김바울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