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A.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사역의 중심이었다


침례(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회개를 선포하였는데, 회개를 선포한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라고 하신 말씀이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4-15).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였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1:3)


한 마디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설교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이었다.


B. 예수님 시대에는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을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의 입을 다물게 할 정도로 박식하게 말씀하신 소문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모였다.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한다. 예수님이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시험하여 묻는다(마 22:34-4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6-38)  바리새인은 또 다른 질문을 마친 뒤 반응을 하였는데,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 22:46)였다.

 

바리새인은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에 대하여 지식적으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톰 헤비스톨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바리새인은 정통 유대교를 고수했으며, 신앙체계도 우리와 비슷하다. 예수님이 대한 몇몇 묘사화 구원관, 성령관 등을 제외하면 그들도 우리의 교리에 선뜻 동의 할 것이다. 바리새인은 바른 교리를 가졌지만, 마음의 태도가 완전히 그릇되었다. 1)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정말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시험하고자 질문하였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변론에서 그의 이단성을 반박할 수 없었다. 신학적으로도 그 당시 가지고 있었던 신학에서 예수님은 전혀 문제가 없으셨다.

 

또한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서 자신들이 추구하고 있는 신앙과 다른 것을 가르치는지 알기 위하여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교리적으로 자신들과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었고, 오직 제자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따르지 않는 것 즉, 손을 씻지 않는 것을 지적했을 뿐이다(마 15:2). 또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을 지적하였을 뿐이다(눅 14:3). 그리고 예수님께 참람하다며 신성모독을 지적했을 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정의를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론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구약의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가르치실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을 시험하러 온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신앙에 대하여 예수님을 시험하였지만, 예수님을 넘어뜨릴 수 없는 이론적이고 실제적인 확고함을 가지고 계셨다. 즉, 바리새인도 인정하고 사두개인도 인정하고 믿고 있는 신앙의 본질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단으로 내몰 수가 없었다.

 

예수님 시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신학의 문제가 아니었다. 바른 신앙의 문제였다. 바른 교리와 성서적인 설교를 바리새인들이 하였다는 것을 예수님은 간접적으로 인정하시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마 23:3).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신학적으로나 성서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음을 이야기하시며, 문제는 그들의 신앙의 실제가 문제임을 지적하였다.

 

예수님은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이 우리의 삶 가운데 실제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라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의 본질에 대한 지식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의 본질이라고 말하면 무엇인지 이론적으로 그들은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신학적으로는 정통이었다. 문제는 실제가 문제였다.

 

예수님 시대에는 바른 교리와 바른 성서적인 가르침 자체가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시대였다. 흡사 오늘날과 비슷하다. 예수님은 바른 신앙의 본질과 우리의 삶 가운데 실제가 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을 예수님 시대에 실제가 되도록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C.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외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이 가까이 왔느니라.”2) 이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전파하신 주님의 의도를 우리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제자들이 외친 메시지는 ‘회개하라(Metanoei'te).’(막 6:12)와 ‘천국이 가까이 왔다(h[ggiken ga;r hJ basileiva tw'n oujranw'n).’(마 10:7) 이었다.

 

주님이 말씀하신 회개의 의미는 이전 장에서 다루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에 대하여 연구하기를 원한다. 마태복음은 천국이라 번역하였는데, 새번역에서는 원어 그대로 ‘하늘나라’라고 번역하였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지칭하는 것이다.

에두아르트 로제는 ‘하나님 나라’와 ‘하늘나라’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를 꺼려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언급하려고 할 때 하늘을 언급한 사실이, 유대교 문헌에서 자주 발견되기 때문이라 하였다.3)

 

폴리갑(Polycarp, A.D 70 ~ 155(?))의 친구이며 사도요한의 제자인 파피아스(Papias, A. D 2세기경)는 “마태가 말씀들을 히브리어로 정리하고 그것들을 각각 그의 역량껏 번역하였다.”고 하였다.4) 뿐만 아니라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Ignatius, A.D 35(?) ~ 117)는 A. D 115년에 본서를 ‘마태복음’이란 이름으로 로마에 가져갔고, 로마의 지방 회의는 120년에 본서를 마태의 책으로 결정하였다.5)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태복음은 히브리어로 먼저 쓰여졌고 후에 헬라어로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역량껏 번역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히브리어의 ‘하나님 나라’는 오늘날 어떤 단어를 사용하셨는지 몇 가지 유추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헬라어로 ‘하나님 나라’ 또는 유대인을 위하여 ‘하늘 나라’라고 번역하였고, 요한복음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인 ‘생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파피아스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 “역량껏 사람들이 번역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를 헬라인에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번역을 시도하였는데 지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가 가장 적절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문화와 환경과 언어 속에서 신앙의 본질이 이해될 수 있는 적합한 단어들을 사용한 것이다. 이미 적합한 상황화 사역이 초대교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있었다.

 

우리시대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가 어떤 의미였는지는, 유대인을 위하여 ‘하늘나라’라고 번역한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유대인의 하늘에 대한 개념 속에는 3가지로 나누어져 있었다.


첫 번째 하늘 - 우리가 살고 있는 하늘(공간)

두 번째 하늘 - 우주

세 번째 하늘 - 하나님이 계신 천국


마태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저술한 마태복음의 ‘하늘나라(basileiva tw'n oujranw'n)’를 단수로 사용하였다. 그 당시 하늘은 복수형(oujranov")으로 사용되었는데, 히브리적 개념을 헬라어로 담아서 ‘하늘(oujranw'n)’이라 하며 단수로 적었다. 이것은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하늘의 개념 중에 첫 번째 하늘을 말하는 것이었다. 유대인 개념으로 이것은 지금 내 곁에 계신 하나님의 의미이다. 그 당시 유대인이 인식한 바로는 우리가 사는 공간, 즉 우리 주변에 임재해 계신 하나님으로 인식하였다. ‘하나님 나라’라고 하지 않고 헬라어로 하늘이라 한 것은, ‘하늘 나라’ 개념이 헬라인이 아닌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마태복음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인 이유에 있다. 그 시대 유대인은 그렇게 이해했지만, 2000년이 지난 오늘은 이것을 다르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달라스 월라드는 이러한 천국에 대한 이상한 번역을 연구하면서, 마태복음에만 ‘천국’이 32번 등장하고 신약에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고 하였다.6) 마태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는 5번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마태복음은 ‘하늘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동의어로 사용하였다. 마태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몰라서 ‘하늘나라’라고 한 것이 아니라, 헬라인들의 삶의 정황 가운데 설명하기 위한‘하나님 나라’라는 단어보다, 유대인들의 삶의 정황에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하늘나라’라는 단어를 가지고 설명한 것이다.

 

달라스 월라드는 “‘하늘 나라’라는 말을 천국으로 번역함으로 오늘날 하늘을 머나먼 곳, 외부 공간, 반대편 공간 등으로 혼동하는 현실이 그리스도와 그의 현재적 통치에 대한 우리의 실제적 믿음에 미치는 폐해는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거기에도 계신다. 그러나 하늘과 하나님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대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늘과 하나님을 저 멀리 딴 곳에, 여기도 아니고 지금도 아닌, 그것도 훨씬 나중에나 만날 대상으로 늘 생각하며 살고 있다.”7)고 하였다.

 

그리스도, 천사, 기타 특이한 현상이 주변 공간 혹은 공중, 즉 성경 세계의 “첫째 하늘”에서 체험되어 진다.8) C. H. 다드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과 마태복음 특유의 천국이라는 말은 동의어이며 ‘하늘’이란 유대 전통에서 흔히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경이의 완곡어로 사용된 말이다.”9)라고 하였다. 달라스 윌라드는 “단어적으로 하늘이 하나님 그분을 지칭한 경우는 종종 있지만, 단어적으로는 모두 하나님 그분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은 우리와 관계 맺으시는 방식을 여실히 보여주는 단어이다. 하늘이란 인간 세계와 관계하여 하나님이 계시는 처소를 정확히 일러 주는 말이다. 반면, ‘하나님 나라’라고만 말할 때는 그런 의미가 없어진다.”10)고 하였다.

 

‘하늘 나라’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공간이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스스로 나타내 보이시기 원하시는 공간이며, 인간과 관계 맺기 간절히 원하시는 공간이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개념인 ‘하나님의 임재’이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형성’의 실마리를 우리 옆에 항상 계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이 실제가 되는 삶을 복음서를 살펴봄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D. 하나님 나라는 지금 이곳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이다


‘나라(바실레이아, basileia)’의 히브리어에 해당하는 말쿠스(tWkl]m')의 중심적인 의미는 영역이라는 구상적인 개념보다는 다스림, 지배, 통치라는 추상적 개념이라고 생각해 왔다. 또한, 바실레이아를 ‘왕의 능력’ 또는 ‘권세’란 개념이 더 기본적인 생각으로 발전하였다.11)

 

예레미아스는 “동양인들이 느끼는 나라(malkuta) 라는 단어의 의미는 서양인들의 왕국의 의미가 아니다. 구약에서 malkuta가 공간적인 의미에서 영역 즉 영토를 의미하는 곳은 아주 적다. 이 말은 거의 언제나 정부, 권위, 왕의 권세를 나타낸다.”12)고 하였다. 합리적인 사고 방식에서의 진전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라고 인식하고 있다.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최대한 배제한 상태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신앙의 개념으로는 하나님의 임재의 개념이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사용된 용어들만 보더라도 그렇다. ‘온다.’ 또는 ‘당도한다.’13)와, 그것을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다.’14)이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인간이 하는 행위는 주로 ‘들어간다.’15)와 ‘받다.’16)로 표시되어 있다. 반면에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또는 ‘확장한다.’등의 동사는 일체 쓰이지 않았다. 이러한 언어의 두드러진 사실은 인간의 노력보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는 영역이다. 즉,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가까이 왔다(h[ggiken ga;r)’는 말은 말 그대로 가까이 왔다는 능동형의 의미이다. 먼 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에 있다는 의미이다. 임재를 나타내는 아주 좋은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임재임과 동시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이다. 히브리적 개념의 문자적 의미로 하나님의 임재는 어떠한 형태와 목적으로서든지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상태이다.17) 하나님의 임재는 실제의 현현과 꿈과 환상 혹은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는 계시를 통해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가장 큰 의미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거주하심”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임재하셔서, 인간의 삶 가운데 주인이 되어서 그 사람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인도하는 것. 즉, 신앙의 본질로 인도하는 임재이며 동시에 신앙의 본질로 나아가는 실제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의 의미는 신앙의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하여 가까이에 임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와 관계 맺으시는 우리가 사는 이 공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임재하여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E. 하나님의 나라는 구약의 신앙의 본질을 예수님 시대에 설명한 신앙의 실제이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이다. 3가지 영역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는, 한 분 되신 하나님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사랑’의 관계이다. 둘째는 하나님 그분을 ‘아는 것’이다. 셋째는 인간과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 문제는, 주님의 통치가 우리 삶에 실제가 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이다. 그 친밀한 관계에 있으면, 주님을 경험하고 알게 되면서 그분의 성품을 닮아간다. 이것이 제자의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성품이 우리 가운데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알아져서, 우리 삶 가운데 이루어진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질문이 바로 이런 개념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님을 갈망하고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목표로 하면, 그분이 임재하셔서 우리가 그분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인도해 주신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포도나무 비유에서의 표현처럼, 주님을 실제의 삶 가운데 인식하며 동행하는 삶을 사는데, 모든 생각과 행동과 말과 뜻의 주도권이 이제는 내가 아니라 주님에게 있는, 실제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시기 때문에 내가 겸손해야지 하는 생각을 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겸손해질 수 있다. 마음이 높아지지 않는다. 그분의 존전 앞에 머물면, 그분의 통치와 그분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의 본질이 실제가 되는 원리같이, 예수님은 실제적인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자신의 모든 삶을 통하여 보여주었다. 복음서에는 그러한 사실이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죽으심과 부활 승천까지 우리가 알아야할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이론적으로 신앙의 본질을 아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라 하였다. 문자 그대로 따르는 행함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나오는 진실한 행함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하나님 나라는 이론적인 추구함이 아니라, 행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실질적인 믿음의 실제이다. 예수님은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마 7:24)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막 3:35)라 하였다. 종교 지도자의 편견을 깨면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셨다(마 12:12; 막 3:4).

 

신앙의 본질을 똑같이 행하지만, 문자적인 행함으로 나아가는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수없는 질타와 교정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무엇인 진실한 행함인지 설명하시고 실제를 보이셨다. 이러한 말씀이 ‘하나님 나라’이다.



1) 톰 헤베스톨, 「불편한 진실, 내 안의 바리새인」 이경미 역, 서울:홍성사 pp. 98-153.

2) 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 에두아르트 로제, 「신약성서신학」 박두환 역, (서울:한국신학연구소, 2002) p. 42.

4) 강병도, QA시스템 성서연구 시리즈, (서울: 기독지혜사, 2001) p. 26.

5) Ibid.,

6) 달라스 윌라드, "하나님의 모략", 윤종석 역, 서울:복있는사람, 2007. pp. 130.

7) 달라스 윌라드, op. cit., pp. 126-127.

8) 달라스 윌라드, op. cit., p. 129.

9) C. H. Dood, The Parable of the Kingdom, New York:Charles Scribner's Sons, 1958. p. 34.

10) 달라스 윌라드,  op. cit., p. 131.

11) G. E Ladd, "하나님 나라에 관한 중요한 문제들", 신성종역, 서울:성광문화사, 1982. p. 84.

12) Joachim jeremias, "신약신학", 정광욱 역 (서울:엠마오, 1977), p. 148.

13) e[rcomai- 마 6:10, 눅 11:2, 막 9:1, 눅 17:20, 눅 22:18; εττιξειν - 막 1:15, 마 5:17, 마 10:7, 눅 10:9, 11, 눅 21:31; φθανειν - 마 12:28, 눅 11:20, 눅 19:11.

14) divdwmi - 눅 12:32, 눅 22:29, 막 4:11.

15) εισερχεσθαι

16) eijsevrcomai - 막 10:15; 눅 18:17, klhronomevw - 마 25:34.

17) 보(כוא)는 ‘들어가다’, ‘오다’라는 뜻으로 ‘자기 백성에게 오다’와 관련 있다. 야라드(דלי)는 ‘내려가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것’, 샤켄 (נכש)은 거주하는 하나님으로 ‘백성들 사이에 거하신다’는 의미이다.

 

 

김바울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