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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소개한 글은 어느 이슬람 전문가라고 자처한 사람이 인터넷에 올린 글을 인용한 것이다. 내부자운동과 상황화에 대한 전형적인 몰이해를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매우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글에 혼란스러워 할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문단 마다 주어지는 내용의 핵심에 대하여 얼마나 큰 몰이해 가운데 글을 쓰고 있는지 밝히고자 한다. 파란색의 설명을 달아,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진정 구주로 믿고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경적인 건전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함이다.  


==== 어느 이슬람 전문가 ====  (출처: http://koreairanianchurch.net/bbs/board.php?bo_table=column_6&wr_id=2430)

이슬람이 날로 폭력적으로 변함에 따라 선교사들이 무슬림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갈수록 어렵게 되었고 선교의 열매를 얻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제까지 행해왔던 평범한 방법으로는 이슬람권에서 더 이상 전도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 소위 내부자 운동(Insider Movements)으로서,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지만 그들에게 굳이 이슬람 사회를 떠나지 말고 계속 무슬림으로 남아서 예전과 똑같이 꾸란을 읽고, 샤하다(이슬람 신앙고백)를 고백하고, 모스크 활동에도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이슬람이 날로 폭력적으로 변하여 선교사들이 무슬림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어느정도 사실일 수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기독교 진영이 수 많은 다양성을 가진 것처럼 이슬람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내부자운동은 선교사들이 무슬림들에게 접근하였던 평범한 방법으로 전도하기가 어려워 등장한 "하나의" 방법이라기 보다는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지금까지 역사 가운데에서 성장하여 왔는지 우리가 관찰하고 살펴볼 수 있는 "실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실상 내부자 운동은 "무슬림" 권에서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위키피디아에 정의되어 있는 내부자 운동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KJFM 2012년도 5/6월호에서) 


정의들(Definitions)

루이스(Lewis: 2007)는 다음과 같이 널리 사용되고 있는 내부자운동에 대한 정의를 제공한다:  

내부자운동이란 (ㄱ) 복음이 기존의 공동체 및 사회 네트워크를 통하여 흘러가서, (ㄴ) 믿는 가정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과 성경의 권위 하에 살면서 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타당한 표현으로서 자신들의 사회-종교적 공동체 내부에 머물러 있는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그리스도 신앙을 지향하는 그 어떤 운동이라도 일컫는 말이다.[2]


히긴스(Higgins: 2004)도 루이스와 비슷한 정의를 내린다:

한 종족집단의 종교적 국면을 포함하는 문화 내부에서 가정과 개개인 혹은 서로가 관계로 얽힌 일련의 사람들이 예수의 신실한 제자가 되는데 그 숫자가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실한 제자도는 성경적으로 신실한 반면 종교적 생활을 포함하여 되도록이면 문화 내부에 지속적으로 살아가도록 문화적으로 적합한 공동체 양식을 표현할 것이다. 성령께서 말씀과 그의 백성들을 통하여 자신의 백성들과 그들의 문화와 종교적 삶 그리고 세계관을 변혁하는 일을 또한 시작하실 것이다.[3]


하나의 사회현상으로서 내부자운동의 출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이다. 그것은 특별한 문화나 언어 양식으로 국한되지 않고 모든 곳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4] 예수께서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그리고 이방인 공동체들 가운데에서 신앙 운동을 일으키셨고, 그의 사도들과 초대 교회도 그와 같은 일을 하였다.[5]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예수 신앙의 기본적인 메시지는 그 메시지를 받아들인 사람들과 사회의 문화 및 언어적인 표현들을 취하게 되었다.

지난 이 세기 동안 정령숭배, 부족신앙, 및 종족적인 종교관습을 따르던 수 많은 사람들이 복음 메시지에 반응을 하였지만, 이슬람, 힌두, 불교, 신토, 유대교 및 시크교 등 보다 대규모인 세계적 규모의 주요 종교전통들 가운데에서는 그와 상대적으로 복음에 반응한 사람들이 많이 없다. 서구 식민지주의의 영향 때문에,[6] 선교 사역들은 종종 “기독교화”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비친다. 이러한 식민지 시대의 선교 사역들은 종종 영국 국교회, 가톨릭, 장로교, 침례교 및 서구의 여러 나라들에서 선교사를 보낸 파송 교단들의 종교적 양식들 및 실천들과 같은 서구 문화의 국면들을 예수 신앙과 결부시킨다.

20세기 후반에 서구 식민지하에 있던 나라들이 독립을 하게 되면서, 선교 실천가들과 학자들은 식민지 선교 실천의 많은 패러다임들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종족 집단회심운동, 토착화, 상황화 및 성육신 사역과 같은 것들이 그 이전의 선교방법들을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그와 함께, 세계의 주요 종교 전통들에 속했던 사람들이 예수께 이끌리게 되었는데 그들은 기독교라는 종교 혹은 기관적 구조 가운데 들어오지 않았다. 예를 들면, 1960년 대에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깊이 있게 성경공부를 한 이후에 예수가 진정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들은 종종 소위 기독교왕국(Christendom)의 일부로서 비치고 유대인들을 역사적으로 학대하였던 나라들과 관련된 크리스천 종교에 감성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연결시키자 않는다. 따라서 이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였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보다는 유대교 내부에 남는 경향이 있었다.[7] 1980년 대 이후에, 비슷한 현상이 다른 비기독교 종교문화 가운데 있던 사람들 가운데에서 보여졌고, 그것은 힌두와 무슬림들 가운데에서 가장 두드러졌다.[9]


내부자운동이라는 용어는 나이지리아에 있는 분파인 크리슬람(Chrislam)과 같이 어떤 두 세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종교를 섞거나 새로운 종교의 형태를 취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부자운동은 종종 병 치유나 꿈 혹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동료친구들에 의한 돌봄 및 다른 영적인 체험 등을 통하여 시작되는 예수께 향하는 풀 뿌리 운동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면 종종 성경과 라디오 방송 및 기타 수단들을 통하여 예수를 더욱 더 알아가도록 개방된다. 만일 예수를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들의 이러한 집단들이 자신들이 태어난 비기독교적인 종교 공동체 내부에 머무르기로 결정하는 경우에 이를 관찰하게 되는 사람들은 종종 그것을 내부자운동이라고 부른다. 정의대로 내부자운동은 외부자들에 의하여 시작되는 것이거나 선교사들의 전략 및 방법론적인 한 유형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전 가정과 공동체들 및 사회 네트워크들이 자신들의 문화전통 내부에서 함께 예수를 따르기로 결정할 때에 발흥하게 되는 하나의 사회 현상이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내부자운동은 하나의 새로운 전도방법이 아님을 알 수 있고, 내부자운동을 지향하는 선교사들이 복음을 무슬림들에게 전하고 그들에게 이슬람 사회를 떠나지 말것과 샤하다를 지속하게 한다든가 모스크를 지속적으로 나갈 것을 권면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하나의 방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시각이요 오해일뿐이다. (사실 내부자운동이나 상황화에 대한 몰이해로 내부자운동과 상황화를 무슬림들에게 접근하고 전도하기 위한 목적의 방법론으로만 생각한 사역자들 가운데에는 자신들이 그러한 결정의 주도권을 행사하여 그렇게 하라고 주문한 경우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의미의 내부자운동이나 상황화의 원리에 위배된다. 왜냐하면 내부자 운동의 원리는 자신들의 종교-문화-사회적인 비성경적 이슈들을 말씀에 비추어 신앙적 결단을 내릴 신앙 공동체 자신들의 주도권을 통한 자신학화를 이야기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비밀로 간직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무슬림 공동체 안에서 동료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믿음을 비밀로 간직함으로써 동료 무슬림들 가운데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무슬림들로서 예수를 믿는 자들이 있는데 내부자 운동 가운데 있는 이들은 기독교인이 아니기에 자신들의 기독교인 됨을 이야기 할 필요가 없이 예수 신앙을 자연스럽게 이야기 하고, 그들의 일상 생활은 예수 중심의 스토리들로 가득차 있어서 믿음과 삶이 함께 하는 것을 경험한 필드 사역자들이 많이 있다.)  


다시 말하면, 무슬림들이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피하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줌으로써 거부감 없이 무슬림들과 교제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내부자 운동을 옹호하는 자들은 이것이야말로 21세기에 마지막 남은 이슬람권 선교의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현재 이슬람국가에서 사역하는 많은 선교사들이 실제로 내부자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상당수의 한국 교회 및 선교 단체들도 내부자 운동을 지지하거나 실천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어로 번역된 "크리슬람"이라는 책의 시각이  소위 이슬람 전문가가 기술하는 바와 같이 내부자운동을 하나의 방법으로 생각하는 시각이고, 실제로 내부자운동을 이야기 하는 이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신 랄프 윈터 박사를 위시한 수 많은 세계선교계의 기라성 같은 국제적 리더들의 대부분 생각도 그것을 무슬림 선교를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여기지 않는다.)  


위클리프/SIL의 성경번역에서 “아버지,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가 무슬림들에게 공격적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이유로 다른 용어로 대체되자 한 선교단체협의체가 사이트에서 반대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성경은 번역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복음주의 학자들의 믿음이다. 그래야 모든 족속과 백성들이 자신들의 방언으로 정확하게 말씀을 이해하고 자신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SIL은 창시자 타운젠드부터 종족과 문화에 대한 전문적인 시각을 가지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입장에서 이해될 수 있는 용어들의 선택을 통하여 의사소통과 대화의 원리를 최대한 적용해 왔다. 어느 한 문화권 가운데에서 분명한 의미로 널리 사용되는 용어들도 다른 문화권에서는 전혀 다른 뜻으로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기에 그대로 사용하면 거의가 오해나 의미의 왜곡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나 용어들이 많이 있다. 특히 아랍 무슬림들과 서구 기독교인들 사이의 역사적인 반목과 종교적 갈등으로 생겨난 편견들은 동일한 용어라고 할지라도 전혀 다른 의미가 일반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에 SIL 등에서 이루어진 용어의 대체에 대한 문제는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천진한 생각이나 복음전도의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나온 방법론적 결정이 아니다. 지금 미국을 중심으로 이러한 이슈는 매우 심도 있게 논의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슈에 우리가 접근할 때에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민감함과 신앙 공동체적인 논의가 필요한데, 아직 한국은 이와 같은 이슈들에 접근할만큼 무슬림 사역의 현장 가운데 쌓여진 깊이 있는 경험을 갖지 못하고 있다. 아직은 미국을 중심한 세계 선교계의 매우 건전한 논의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내부자 운동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성경책이 적당하지 않았는지 무슬림 전도를 위한 새로운 성경을 번역 출판하였다. 위클리프 언어학 연구원(SIL)은 수백만 달러를 모금하여 무슬림들을 위한 아랍어 성경을 “선지자들의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지칭하는 부분에서 ‘아버지’라는 단어 대신 ‘주’라는 말로 바꿨으며, 하나님의 ‘아들’ 대신에 ‘메시야’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프론티어스가 제작하고 SIL이 배포한 마태복음 터키어 번역본에는 하나님 ‘아버지’ 대신에 ‘보호자’로, 하나님의 ‘아들’ 대신에 ‘대리인’으로 번역했다고 한다. 이것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신앙을 부정하며 삼위일체가 다신론을 섬기는 우상숭배요 신성모독이라고 여기는 무슬림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앞에 이미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이러한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복음의 의사소통의 이슈가 들어 있다. 일부 번역에서 그렇게 이루어진 것에 대하여 무슬림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발상에서 나왔다고 주장한 것은 소위 "이슬람 전문가"라고 하는 본 글의 논지를 펴는 어느 분의 주장일 뿐이다. 실제로 무슬림들이 생각하고 있는 삼위일체는 그 용어를 사용하였을 때에 그들이 생각하듯이 "신과 인간의 육체적인 관계 가운데 태어난 예수"라고 하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어떤 크리스천들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소위 그리스-로마 신화 같은 이야기를 확증해 주는 꼴이 되어서 번역상 주의가 매우 필요한 부분이다.)


어떤 이들은 내부자 운동을 상황화의 한 형태로 이해하기도 한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상황화라는 방법은 매우 유익하다. 전도하려는 대상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같은 음식을 먹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다. 영혼 구원이라는 대 전제를 위해서 문화의 옷은 얼마든지 갈아입어도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상적인 상황화이며 복음 전파에 있어서 반드시 적용되어야 하고 그 효과 또한 매우 긍정적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상황화를 적용함에 있어서 반드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복음의 핵심만은 절대로 양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언급하면 본 "이슬람 전문가"는 상황화나 내부자 운동에 대한 이해나 지식이 거의 없는 듯 보인다. 물론 상황화 가운데에 들어 있는 의사소통의 원리를 방법론적으로 보자면 "화자"의 입장에서 "청자"의 모습을 갖는 것이 효과적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오엠에프의 설립자인 허드슨 테일러와 같은 선교사는 청나라 사람들 처럼 변발을 하고 중국인 복장을 함으로써 그들에게 나아 갔다. 허드슨 테일러가 그렇게 한 것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중국인들을 기만하였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슬림들과 온전한 의사소통을 이루기 위하여 그들과 같은 옷이나 언어, 음식 등을 취하는 것에 대하여 본 "이슬람 전문가"는 동의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 이러한 상황화에 외적인 모습을 취하는데에서 오는 내적인 정체성에 도전 및 갈등 그리고 신앙의 양심을 다루는 상황화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언급하지 못하고 상황화에 대한 매우 피상적 설명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상황화는 하나의 방법이 아니라 혼합주의를 가능한 배제하기 위하여 우리가 복음전도에 꼭 적용해야 하는 원리이다.) 

  

그렇다면 내부자 운동은 어떤 점에서 복음의 핵심에서 벗어났는가? 첫째, 십계명의 첫번째 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내부자 운동을 하는 자들은 무슬림들의 마음을 얻고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도 알라를 믿는 무슬림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알라=하나님, 무슬림=하나님께 복종하는 자, 라는 공식이 들어있다. 그래서 사실은 기독교인이지만 하나님께 복종하기 때문에 자칭 무슬림이라고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자기들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핍박을 면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이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알라와 전혀 다른 신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알라는 메카 지역의 꾸라이시 종족이 섬기던 우상의 이름이었다. 그 우상은 아라비아의 최고신으로 불렸으며 라트(Lat), 우짜(Uzza), 마나트(Manat)라고 불리는 세 딸이 있던 신이었다. 무함마드는 알라와 세 딸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알라(Allah)를 기독교와 유대교인들이 섬기던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신이라고 주장했지만, 무함마드와 동시대에 살던 아랍인들과 그 조상들은 그들을 알라의 딸들이라고 불러왔었다는 사실을 꾸란에서 인정하고 있다.(꾸란53:19-23)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알라를 믿는 무슬림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에 대한 신앙고백 행위인 것이다.


(이미 앞에 많은 설명을 했기 때문에 여기 있는 긴 문장에 대한 조목조목 반론이나 설명을 하지 않도록 한다. 그러나 여기에 주장하고 있는 본 "어느 이슬람 전문가"의 이야기는 본인의 주장일 뿐이다. 그리고 이슬람에 대하여 균형 잡힌 시각을 갖기 원하는 독자는 튀빙겐 대학 교수로서 정통 기독론의 대가요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에 대한 패러다임적 기술을 한 한스 큉의 "이슬람"이라는 책을 꼭 숙독하기 바란다.)


두 번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대속을 부인하는 것과 다름 없다. 내부자 운동을 하는 자들은 무슬림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이싸 알 마씨를 통해서 알라를 섬기는 무슬림’이라고 한다. 이싸는 예수라고 번역되고 알 마씨는 그리스도로 번역되고 있는 아랍어다. 즉,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라를 섬기는 무슬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싸 알 마씨가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단지 무슬림들의 그럴듯한 설득에 속은 것이다. 아랍권의 크리스천들은 예수를 이싸(Isa)라고 부르지 않고 야슈아(Yashua)라고 부른다. 야슈아와 이싸는 다른 인물이다. 성경의 야슈아는 알라로부터 책을 받은 일이 없는데 꾸란의 이싸는 태어날 때 책을 받았다고 한다.(꾸란19:30) 야슈아는 유다 지파에 속한 마리아의 몸에서 났지만, 이싸는 레위 지파에 속한 모세와 아론의 누이 마리얌의 몸에서 났다.(꾸란19:28) 야슈아는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루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인류 구원을 완성하신 인류의 구세주이지만, 꾸란의 이싸는 십자가에 죽지도 않았고 부활하지도 않았다.(꾸란4:157-158) 다만 구약이 진리라는 것을 확증하고 장차 아흐마드(무함마드와 같은 뜻)가 올 것을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 보내진 알라의 사도(꾸란61:6)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꾸란의 이싸는 알라의 종이며(꾸란19:30) 무슬림이었다. 무슬림들은 꾸란에 나타난 이싸를 근거로 기독교의 대속 신앙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하고 공격한다. 그런데 내부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꾸란의 이싸 알 마씨를 통해서 알라를 믿는 무슬림들이라고 소개한다고 하니, 그렇게 하면서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품은 알곡을 생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성경과 다른 책들을 다룰 때에 분명한 것은 성경은 텍스트이고 다른 책들을 콘텍스트라는 것이다. 즉, 콘텍스트에 등장하는 것들을 텍스트라고 하는 기준을 통해서 비추어보는 것이다. 즉, 그 두 가지를 동등한 선에 올려 놓고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알꾸란은 콘텍스트이고 성경과는 그 성격이 달라 거의가 "담화"적이다. 성경에는 역사적인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시대를 살아간 성경의 저자들이 자신들의 인격과 개성이 배제 되지 않으면서도 성경의 원 저자이신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따라서 기록한 책이기에 매우 역사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알꾸란은 그 내용의 배열부터가 전혀 역사적이지 않고, 알꾸란에서 언급한 성경의 내용들도 거의가 담화에 등장하는 것이어서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성경과 관련된 것 같은 그러한 부분이 그곳에 들어 갔는지 상황적(콘텍스트적) 분석과 이해가 필요하다. 그것은 성경 자체가 증거하는 자증성이라든가 사실성과는 관계 없이 알꾸란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상황에 충실하게 인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성경"과 "알꾸란"을 동일 선상에 놓고 그 내용들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그렇기 때문에 알꾸란이 얼마나 거짓을 이야기 하는지와 같은 이야기는 자체가 의미가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 행위는 "성경"과 "알꾸란"을 오히려 동등한 수준에 놓고 비교하려고 시도하는 일부 비교종교학자나 기독교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태도일 뿐이다.)  


셋째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다. 내부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무슬림이라고 말할 때 무슬림의 정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무슬림이란 세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그 첫째는 알라와 무함마드를 신앙의 대상으로 믿는 자, 둘째는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 자, 셋째는 생명과 재산을 바쳐서 지하드(불신자들을 죽이는 전쟁)하는 자이다. 이런 자들만이 진정한 무슬림이라고 이슬람의 경전 꾸란에 정의하고 있다.(꾸란49:15)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스스로 무슬림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 자살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무슬림들에게 신임을 얻기 위해서 예수의 신성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며 삼위일체까지 부인한다. 이들은 교회를 멀리해야 하고 교회 대신에 모스크에 나가야 한다. 구원의 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모두 부인하는 꾸란을 거룩한 경전으로 인정하며,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하면서 그를 칭송할 때 함께 동조한다. 무슬림들이 모여서 하루에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하여 기도할 때는 같이 줄서서 기도를 한다. 무슬림들의  기도의 내용은 오직 한 가지다. 알라의 진노를 받은 유대인들이나 방황하는 기독교인들이 가지 않는 옳은 길로 인도해 달라고 비는 것이다.(꾸란1:6-7) 자신이 기독교인이면서 무슬림처럼 엎드려 그들과 같이 기도하면서 기독교인들을 방황하는 무리라고 고백하고 있다는 것은 모순이다.

 



(여기에서 본 내용을 주장하는 "어느 이슬람 전문가"는 실제적으로 이슬람에서 주장하고 있는 그것을 마치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무슬림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예수를 진정으로 믿게 된 자들은 말씀에서 자신들의 신앙과 문화적인 그리고 이전에 내/외적으로 몸 담고 있는 종교적인 문제들 간에 생겨나는 필연적인 갈등들을 풀어가고자  하기 때문에 여기 기술하고 있는 "어느 이술람 전문가"의 진술은 전혀 사실적이지 않고 자신의 상상을 기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내부자 운동 요원들은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도바울과 예수님의 성육신을 예로 든다. 성경에 보면 사도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양으로 복음을 전하자고 했는데 왜 우리는 무슬림을 얻기 위해서 무슬림의 모양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면 안 되느냐고 질문한다. 또는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하늘 보좌를 떠나서 육신을 입고 죄인처럼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는데, 우리는 왜 무슬림들 가운데로 들어가서 무슬림들처럼 살면서 복음을 전하면 안 되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무슬림들 속에 들어가 무슬림처럼 되는 내부자 운동은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분들은 문화의 옷은 바꿔 입었지만 복음의 본질은 변질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고 돌에 맞기도 하고 태형을 맞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했으며, 예수님은 당시의 유대 교권자들과 복음을 타협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신 것이다.


(본 진술에도 상당히 부정적인 어조가 흐르고 있으나 일단 이 내용은 우리 모두가 잘 이해하고 있고 또 실제적으로 사도 바울과 예수님 당신 조차 그렇게 성육신적 의사소통 원리를 그대로 실천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또한 우리의 사역과 삶의 원리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응답한다. 그러나 다음 부분은 완전한 몰이해이다. 즉 상황화나 내부자운동을 마치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양보한다고 생각하는데, 너무나 많은 내부자들이 예수 이름 때문에 집이 불타고 감옥에 가고 가족 간에도 어려움이 생기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매우 주의할 일은 서로 다른 종교구조주의 가운데 있어서 생겨나는 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핍박과 순수한 예수 신앙에 의한 핍박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래 적은 상당한 분량의 글들은 전혀 실제적인 상황을 기술하지 못하는 상상으로 적은 글이기에 다른 응답의 글을 적지 않는다. 또한 다른 설명들도 전혀 성경적이거나 신학적이지 않은 자의적인 생각을 나열한 것들이기에 다른 언급은 피하기로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온전한 시각을 갖지 못한다면 일반인이 하나의 종교로 보는 기독교라는 종교의 이름으로 사실상 얼마든지 예수님을 욕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기에, 마지막 선교시대에 제 11시의 일꾼으로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고 한다면 이전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크고 기이한 일들을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 목전에서 행하시는지 부름 받은 사역자로서의 겸비함과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열정을 소유한 자들로 우리 주님의 몸을 세워가야겠다.)


그러나 지금 내부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양보한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와 예수님의 신성, 대속죄물 되심을 부인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는 꾸란을 거룩한 책으로 인정하고, 그렇게 가르친 무함마드도 거룩한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한다. 하루 다섯 번의 무슬림 기도와 모스크 출석을 한다. 무슬림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완전한 무슬림처럼 의식주를 따라하면서 턱수염까지 기르고 여성은 차도르를 쓰고 살아간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자신을 무슬림으로 확신시키려는 자들이 어떻게 무슬림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음을 설득하려고 한다. 복음을 위해 기꺼이 모든 고난과 핍박을 감수했던 사도바울과 얼마나 대조되는 모습인가! 


개종한 기독교인들을 무슬림 사회 밖으로 빼오지 말고 그 안에 그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 내부자 운동의 핵심이라면, 이것이야 말로 성경과는 정반대의 이론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왜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라고 하셨나? 그 땅이 우상숭배의 땅이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왜 출애굽해야 했나? 애굽이 타락했기 때문이었다. 이슬람권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거짓 진리가 지배하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야 하는가? 아니면 신앙적인 신념을 굽히고 타협하면서 머물러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할 때 이 동네에서 핍박하면 저 동네로 피하라고 하셨지(마10:23) 적당히 타협하고 그 땅에 머무르라고 하지 않으셨다.


최근에 여러 나라 무슬림 출신의 기독교인 학자들이 내부자운동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묶어『크리슬람(Chrislam)』이라는 책을 펴냈다. ‘크리슬람(Chrislam)’이란 기독교와 이슬람을 혼합하여 전도하는 선교전략을 의미한다. 그들은 소위 내부자 운동가들이 진리의 말씀을 기독교도 아니고 이슬람도 아닌 신종합성종교로 변조시키고 있는데 대해 분노한다. 내부자 운동은 결코 선교의 열매가 있을 수 없는 허구일 뿐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무슬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무슬림들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극히 소수의 예외는 있겠지만 보통 무슬림들은 외국의 기독교인이 그들 가운데 사는 것에 대해서 전혀 거부감이 없다. 오히려 외국인이 무슬림이 되어서 자신들과 함께 살고 있다면 매우 신기하고 이상한 현상으로 생각한다. 무슬림 종교지도자들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 “이슬람이 기독교보다 더 훌륭한 종교라는 증거”로 이용하고 싶어 한다. 성경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고 말씀하신다. 또한 저희가 무슬림 모양으로 억지로 무슬림 율법을 지키며 살라고 하는 이유는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갈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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